23명의 꿈 앗아간 '하얀 석유'의 그늘…대비도 없었다 [사사건건]

화성공장 화재, 리튬 특성 탓에 피해 커져
물·일반소화기 진화 어렵지만…관련 제도 無
외국인 노동자 불법파견 논란도
  • 등록 2024-06-29 오전 9:00:31

    수정 2024-06-29 오전 9:00:31

[이데일리 박기주 기자] 지난 24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의 한 일차전지 제조업체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 화재라고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좀처럼 불길이 잡히지 않고 수십명의 실종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결국 이 불은 23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나서야 끝이 났습니다.

지난 27일 대구 서구 가드케이 대구공장에서 열린 ‘리튬 배터리 화재 전용 소화 장치 시연’에 앞서 원통형 리튬 배터리에 열폭주 현상을 일으키는 모습. (사진= 연합뉴스)


이번 화재의 가장 큰 특징은 ‘꺼질 듯 꺼지지 않았다’는 것인데요. 배터리 소재의 핵심인 리튬의 특성 탓이었습니다. 리튬은 배터리에 주로 사용되는 모바일·전기차 시대에 없어선 안 될 ‘하얀 석유’로 불리는 물질입니다. 리튬은 자연발화성 및 금수성(禁水性) 속성을 지닌 금속물질이어서 고온·고압이나 수분 등 특정 외부환경에 노출되면 쉽게 폭발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졌죠.

실제 이번 화재 현장이 담긴 폐쇄회로(CC)TV 영상을 보면 처음엔 배터리 하나에서 연기가 나며 불이 붙기 시작하더니 옆에 보관돼 있던 배터리들이 순차적으로 같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고열이 옆 배터리로 전달되며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리튬 배터리의 ‘열 폭주’ 현상이 벌어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입니다.

여기에 직원들은 일반 소화기로 진화를 시도했는데요. 리튬의 특성 탓에 기존 분말·질식 소화기로는 불을 끄기 어려운데, 이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진화에 나선 것이죠. 결국, 직원들은 불을 끌 수 없는 방법을 시도하다 도망칠 수 있는 ‘골든 타임’을 놓쳐버리게 된 셈이 됐습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해당 업체가 이런 화재에 전혀 대비가 돼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3월 화성소방서 남양119안전센터는 해당 공장에 대한 소방활동조사를 진행한 후, 이번 화재가 발생한 공장 3동을 특정해 ‘3동 제품 생산라인 급격한 연소로 인한 인명피해 우려 있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화재 우려가 있으니 이에 대비하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리튬 화재를 진압할 수 있는 ‘금속소화기’는 국내에선 설치가 의무화돼 있지도 않았고, 해당 공장에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일반 화학물질로 분류 돼 있어 이에 대한 위기 대응 방식도 정해져 있지 않았죠. 이 때문에 리튬에 대한 별도의 안전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류상일 동의대 소방행정학과 교수는 “배터리 화재는 진화가 매우 어렵고 계속 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불이 꺼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불이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며 “전부 탈 때까지 불이 지속되며 예방이 최선이다. 화재 예방, 관리, 초기진압 대비 강화 등에 소방과 기업이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경기도 화성 일차전지 공장 화재 다시 CCTV 화면 (자료= 중앙긴급구조통제단)
그리고 이번 화재의 희생자 대다수가 외국인 노동자였는데요. 해당 공장이 불법 파견 형식으로 일을 시킨 것이 피해를 키운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업체가 위험 등을 분명하게 직원들에게 인지시키고 업무를 지시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생략돼 피해가 커졌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업체 측은 불법 파견이 없었다고 일축했지만, 아리셀에 인력을 공급했던 업체의 증언, 숨진 외국인의 비자 성격 등을 볼때 이 혐의는 짙어지는 모양새입니다.

경찰은 이번 화재 사고의 원인에 대한 조사를 위해 대규모 수사팀을 꾸렸는데요. 회사 대표에 대한 출국금지, 현장 압수수색 등 강도높은 수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안타까운 사고가 또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수사가 이뤄지고, 정부 차원에서도 제도적 기반을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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