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의원이 일반에 알려진 것은 지난해 제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2번으로 이름을 올리면서부터다. 이 의원은 당시 경선 홍보영상에서 스스로를 “젊은 시절 그 흔한 사진 한 장 없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으로 3년여 동안 수배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2002년 5월 체포돼 징역 2년6월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다 이듬해 노무현정부에서 8.15 특별사면으로 가석방됐다. 또 2005년에는 사면·복권됐다. 여권과 보수단체는 이러한 그의 전력을 들어 국회 진출을 반대했다.
국회에 진출한 이 의원은 스스로 종북주의자임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비례대표 당선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의 3대 세습과 관련해 “내재적 접근론에 공감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북한 문제는 북한 내부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뜻의 이 같은 발언으로 그는 비난을 받았다.
또 지난 4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는 “북의 핵 보유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기존 해법은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며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 의원의 여의도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국회 입성 직후 그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건의 중심에 섰다. 민족해방(NL) 계열 운동권 조직으로 알려진 경기동부연합 출신 당권파들이 중복·대리 투표로 몰표를 던져 이 의원을 당선시켰다는 의혹이다. 이 과정에서 심상정 의원 등 비당권파가 통합진보당에서 탈당해 진보정의당(현 정의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이 의원은 검찰의 전방위 수사 끝에 지난 2010년 광주 및 전남 교육감 선거 등에서 선거비용을 부풀려 국고로부터 부당하게 보전받은 혐의로 지난해 10월 불구속 기소됐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지난 3월 이 의원에 대한 자격심사안을 공동 발의했으며 현재 국회 윤리특위 산하 자격심사소위에 계류 중이다.
이 의원은 대학 시절 이념 서클인 ‘가면극연구회’ 회원들과 사상학습을 하며 “김일성은 항일무장 유격 투쟁을 전개해 일제로부터 조국 독립을 쟁취하고 민족의 자주독립 국가건설로 이끈 절세의 애국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82학번인 이 의원은 85년 6월 학내 불법시위로 제적당했다가 85년 구제조치를 통해 재입학한 전력도 있다.
가정사는 불행하다. 국방부 부이사관이었던 누나 이경선 씨는 민혁당 사건으로 수배생활을 하던 이 의원에게 생활비를 지원했다가 정직 처분을 받았고, ‘다발성 경화증’을 앓은 끝에 2005년 6월 숨졌다. 모친 김복순 씨도 투병 끝에 2008년 3월 사망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혼도 당했다. 이 의원의 아들은 유학을 이유로 징병검사를 연기하고 해외로 출국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