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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 미술관이라면 단연 ‘높고 넓은 공간’이다. 그 이점을 십분 활용했다. 5m는 넘을 탄탄한 기념비를 세우고 로켓폭탄과 볼펜을 본뜬 모형을 거꾸로 박아놨다. 초록 잔디 무성한 작은 축구장도 들였다. 이 모두를 비추는 커다란 거울벽을 지나 또 다른 방에 들어서면 낮은 단이 보인다. 의자 몇 개를 띄엄띄엄 놨다. 하나하나는 지극히 멀쩡한 구조물이나 제대로 섞이질 못한다. 맞다. “환경·맥락과 떨어져 존재하는 게 가능한가를 묻는 조각”이라 했다(김민애 ‘1. 안녕하세요 2. 헬로우’).
#2. 여기는 차라리 ‘광장’이다. 그 광장에 오도카니 선 나무문살이 시선을 끈다. 특이한 건 문살에 심었다는 장단. ‘332, 321’ 한국 전통 여인들이 불렀을 ‘야한 노래’를 장단으로 구현했단다. 그러고 보니 문살을 닮은 벽장식도 눈에 띈다. 문살 문양으로 달을 형상화했다. 한 귀퉁이에는 구슬을 튕겨 타원을 돌게 만든 나무틀이 보인다. 프랑스 전통 놀이기구로 ‘여자 몸’을 닮았다고 했다. 벽 한쪽에 걸어둔 유리목걸이는 전혀 다른 ‘연출’이다. “세계 각지 지인들이 보내준 강물을 유리용기에 담아냈다”고 했다(이슬기 ‘동동다리거리’).
#3. 두껍게 내린 커튼 안에 영상이 돌고 있다. 인조인간을 제작하는 듯한 섬뜩한 장면. 중국에서 섹스돌을 만드는 공장의 풍경이라고 했다. ‘열악한’ 노동현장, 이런 건 아닌 듯하다. 인간을 대체하는 상품을 만들고 소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설명이 들린다. 그 영상에서 빼낸 몇몇 사진도 강렬하다. 섹스돌을 근접 촬영한 것이다. ‘인형’이 주제인 영상은 더 있다. 일본을 배경으로, 사람 대신 인형과 산다는 ‘겐지’, 인공지능 로봇을 선거에 출마시킨 ‘마츠다’ 이야기를 교차했다. “인간이 싫어 인형이지만, 어쩔 수 없이 인간으로 돌아가야 하는 디스토피아적 결말”이라고 했다(정윤석 ‘내일’).
#4. 노랗고 파랗고 붉은 가림벽에 거대한 사진들이 걸렸다. 하얀 바닥에 뚝 떨어진 푸른별이 먼저 보인다. 바닥에 금은 냈지만 용케 꺼지진 않았다. 그 곁을 스치면 마그마가 솟구치는 현장을 등지고 리코더를 불고 있는 남자, 헬스기구에 앉아 노를 젓는 남자 등이 차례로 보인다. 동물과 꽃, 누군가의 아들일 꼬마의 큰 얼굴도 발길을 붙든다. 24인의 예술가를 한자리에 부른 공간. 그들과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듣고 사진으로 담았다고 했다. “작가로 사는 삶과 작가로 하는 예술은 별개의 문제더라”고 했다(정희승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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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금 지원·영상 제작 등 혜택·특전 최고
미술계의 한 해 마무리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하는 ‘올해의 작가상’에서 정점을 찍는다. 자타가 부인하지 않는 ‘대한민국 대표 미술상’이기 때문이다. 관심도 높고 기대도 크다. 작가는 작가대로 영예를, 미술관은 미술관대로 미술계를 가늠하는 지표로 ‘공신력’을 얻는다. 다만 여느 해와 다르다면 코로나 시국에 일정이 좀 미뤄진 것. 지난해 이맘때에는 이미 ‘최종 수상자’를 선정하고 한 해 일정을 마무리했더랬다.
그 영향력만큼 후원작가들에겐 특별한 혜택이 주어진다. “동시대 미학적,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역량 있는 시각예술가”로 인정받는 것은 물론, 웬만한 작가는 꿈도 꾸지 못할 ‘국립 공간’에서 기량과 비전을 최대로 꺼내보일 수 있다. 미술관과 공동주최하는 SBS문화재단이 내놓는 ‘특전’은 더 크다. 후원금 4000만원씩을 지원하고 도록·홍보 영상을 제작해주며 ‘현대미술 다큐멘터리’로 제작·방영한다. 해외로 영역을 넓히겠다는 작가에게는 ‘액수를 굳이 드러내지 않는’ 프로젝트 지원금도 따른다. 이쯤 되면 미술작가 누구라도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진짜 막강한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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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콘텐츠, 숨어버린 작가정신
무엇보다 전시를 꿰뚫어야 할, ‘올해의 작가상’의 무게와 비중이 4인 작가에게 제대로 전달됐는지가 의문이다. 개성과 특기를 ‘마음껏 발휘’하라 했더라도 결국 한 공간에서 같은 제목 아래 묶이는 전시가 아닌가. 다른 장소에서 열어온 개인전처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꾸미는’ 단계는 넘어서야 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전시장 어디에서도 ‘올해의 작가상’을 실감케 할 분위기는 나질 않는다. 작은 갤러리의 기획전이라도 ‘맥락’은 있는 법인데.
어설픈 콘텐츠도 섭섭하다. ‘자신의 방’ 안에서조차 따로 노는 작품들, 완성도와는 별도로 툭툭 던져놓은 듯한 몇몇 작품들이 거대한 공간을 허비한 듯하달까. 한마디로 ‘올해의 작가상’ 후원작가 1인을 실감 나게 내보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선명한 작가정신 역시 아쉽다. 어떤 작품을 내놓아도 ‘작가 아무개’는 보여야 하는데, 애써 찾아내야 할 정도라면 문제가 적지 않다. 작가가 설명을 해도 잘 와 닿지 않는 그것이 관람객 홀로 둘러볼 때야 오죽하겠는가.
물론 코로나 시국이 가로막았을 작업의 어려움과 전시의 애로를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래저래 미술관이 유일하게 내세워 온 한 줄 “동시대 미학적,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에서 올해는 온전한 점수를 받긴 어렵게 됐다. 파격 아니면 공감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어느 쪽도 뜨질 않는다. 작가보단 미술관이다. 기대치에 부합하는, ‘작가상’ 위상에 걸맞은 수준을 조율할 책임은 어디까지나 미술관에 있으니까. ‘올해의 작가상’ 전이 그저 ‘함량 미달이면 최종 수상자 선정에서 떨어뜨리면 그만’인 전시가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전시는 서울관에서 내년 4월 4일까지다. 최종 수상자는 그 중간인 2월에 발표할 예정이다. 수상자에게는 ‘2020 올해의 작가’ 타이틀과 더불어 1000만원을 추가로 지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