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 김환기 옆 사위 윤형근…'그림의 전설' 인사동에 모였다

노화랑 '한국 전설의 추상회화' 전
韓대표 추상회화 1세대 한자리 모여
김환기·윤형근·박서보 등 9명 2점씩
상업화랑 이례적…보험가액 100억대
"예술의 기본적 가치인 위안을 전달"
  • 등록 2021-03-04 오전 3:30:00

    수정 2021-04-08 오전 11:50:32

서울 종로구 인사동 노화랑서 연 기획전 ‘한국 전설의 추상회화’ 전경 일부. 김환기가 1970년에 그린 ‘무제 22-Ⅲ-70 #158’(왼쪽)과 윤형근이 1993·1996년에 각각 그린 ‘청다색’(Burnt Umber & Ultramarine)이 나란히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살자면 별 병도 생기나 보다. 한 3년 견뎌왔는데 결국은 병원에 들어와서 나흘째 된다. 휴양하는 것도 같고 고문을 당하는 것도 같고 창밖으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도 아무 생각이 안 난다. … 병원의 식사는 훌륭해서 좋다. 걱정들 말라. 수화”(1974년 7월 10일).

이 엽서를 띄운 수화 김환기(1913∼1974)는 보름 뒤 세상을 떴다. 미국 뉴욕에서 61세에 맞은 여름이었다. 그렇다면 엽서는 어디로 날아갔던 건가.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사는 사위다. 큰딸 김영숙과 결혼한 제자 윤형근(1928∼2007). 엽서가 먼저 도착했을까, 부음이 먼저 도착했을까. 훗날 윤형근은 “너무나 불쌍하고 뭔지 모르게 한없이 원통해서 밤새도록 통곡을 했다”고 말했다.

언제 되돌려도 가슴이 먹먹한 이 장면을 다시 떠올린 건 벽면에 나란히 걸린 그이들의 작품을 보면서다. 새삼스러운 소개가 더 어색한 김환기와 그이를 평생 아버지로 불렀다는 윤형근이 인사동 한 화랑에서 작품으로나마 옛정을 나누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서 독보적인 작가 9인전

서울 종로구 인사동 노화랑에서 신년기획전으로 마련한 ‘한국 전설의 추상회화’ 전.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사와 미술시장을 견인하고 있는, 말 그대로 ‘전설’인 추상회화 1세대 작가 9명의 작품들을 내걸고 있다. 김환기·윤형근을 앞세운 박서보(90), 정상화(89), 하종현(86), 최명영(80), 서승원(79), 이강소(78), 김태호(73)다. 평생 산처럼 쌓은 그들의 작품세계를 어렵지 않게 가늠할 작품 2점씩을 엄선해 18점을 출품했다. 다만 타계하던 해에 그린 김환기의 전면점화 ‘09-Ⅴ-74 #332’(1974)는 100억원대에 달하는 작품가의 부담 때문에 전시장에는 나오지 못했다. 푸름이 지쳐 회색빛이 된 화면에 뻗쳐나간 방사선이 긴 여백을 만든 말년의 수작이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노화랑서 연 기획전 ‘한국 전설의 추상회화’ 전경 일부. 왼쪽부터 박서보의 ‘묘법(Ecriture) No.110903’(2011), 서승원의 ‘동시성(Simultaneity) 19-913’(2019)과 ‘동시성 19-912’(2019), 정상화의 ‘무제 86-3-9’(1986)와 ‘무제 90-3-4’(1990)가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김환기의 작품은 ‘무제 22-Ⅲ-70 #158’(1970). 화면 상단과 중하단에 색색의 점을 이고 안은 수많은 검은 점들은 촘촘한 사각틀 안에서 번지면 번지는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아주 자유롭다. 심혈을 다해 찍을 뿐, 그 점들이 어디로 가는지 굳이 막아서지 않은 김환기 화풍 그대로다.

장인의 이 작품을 비스듬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위 윤형근의 작품은 ‘청다색’(Burnt Umber & Ultramarine) 두 점(1993·1996). 깊은 지층에서 길어 올린 듯한 흙빛을 얹은 그림이다. 윤형근의 독특한 화법인, 마포에 수묵화인 양 번져내는 ‘한지실험’ 효과는 김환기의 제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업화랑 규모 뛰어넘어…보험가액 100억원대

아흔의 당당한 현역으로 다음 달 영국 런던 화이트큐브갤러리에서 여는 회고전을 준비 중인 박서보는 ‘묘법(Ecriture) No.110903’(2011)과 ‘묘법 No.130201’(2013)을 걸었다. 한지를 활용한 ‘묘법’ 연작은 박서보의 대표 브랜드. 두 작품은 화면 정중앙에 다른 형태, 다른 색의 긴 막대를 세워 조화와 변화 둘 다를 꾀하고 있다.

역시 4월 미국 뉴욕 티나킴갤러리, 내년 로스앤젤레스 전시를 앞뒀다는 ‘바쁜’ 하종현은 ‘접합’(Conjunction) 연작 중 ‘접합 19-57’(2019)과 ‘접합 20-72’(2020)를 냈다. 캔버스 뒤에서 물감을 밀어 앞쪽으로 배어나오게 하는 방식으로 작업한 작품들이다.

‘한국 전설의 추상회화’ 전에 걸린 하종현의 ‘접합’(Conjunction) 19-57’(2019·왼쪽)과 ‘접합 20-72’(2020)(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정상화는 화이트톤의 ‘무제 86-3-9’(1986)와 블루톤의 ‘무제 90-3-4’(1990)를 내놨다. ‘물감 칠하기’와 ‘물감 뜯기’를 반복해온 그이의 평생 작업에서 중기쯤 해당하는 작품들이다. 이외에도 최명영은 물감을 밀어내 만든 붉은 ‘평면조건 20-815’(2020)와 회색조의 ‘평면조건 20-821’(2020)을, 서승원은 점점 더 소멸해가는 형체·색채를 잠시 멈춰 세운 ‘동시성(Simultaneity) 19-912’(2019)와 ‘동시성 19-913’(2019)을 냈다. 서예의 필획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강소는 ‘청명(Serenity)-16085’(2016)와 ‘청명-18107’(2018), 캔버스에 겹칠한 물감을 조각도로 깎아내는 노동을 보태는 김태호는 ‘내재율(Internal Rhythm) 2020-51’(2020)과 ‘내재율 2020-83’(2020)을 걸었다.

‘한국 전설의 추상회화’ 전에 나온 최명영의 ‘평면조건 20-821’(2020·왼쪽)과 이강소의 ‘청명(Serenity)-16085’(2016)(사진=노화랑).


어느 한 점도 소홀히 지나칠 수 없다는 게 특징이랄까. 보험가액만 100억원대. 상업화랑의 ‘보통 규모’를 뛰어넘는다. 어찌 보면 노승진(74) 노화랑 대표의 소신이고 고집이다.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가 없다면 예술이 존재할 이유가 있겠느냐”고 했다. 먹고살기도 빠듯했던 시절, 자신의 모든 걸 던졌던 전설들의 예술이 ‘바로 지금 여기’에 나와있는 의미란 뜻이다. 전시는 6일까지다. 기간이 짧다. 서둘러 나서는 게 좋겠다.

노화랑 기획전 ‘한국 전설의 추상회화’를 찾은 한 관람객이 김태호의 ‘내재율(Internal Rhythm) 2020-51’(2020)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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