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8점 면면을 보니 그가 보인다…'컬렉터 이건희'의 취향

회화부터 판화·드로잉·조각·공예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기증한 이건희컬렉션
가격고하·장르불문 '동서고금 다양성'
100년만에 빛을 본 이상원 '무릉도원'
50년만에 존재 드러낸 이중섭 '흰 소'
"오랜 열정·전문성 가미한 광폭 시각"
  • 등록 2021-05-10 오전 3:30:00

    수정 2021-05-10 오전 6:10:28

국립현대미술관이 지난 7일 세부 공개한 이건희컬렉션 기증작 1488점 중 주요 작품. 소장처조차 몰랐던 소장품, 눈이 아닌 귀로만 들어온 희귀작·진귀작이 다수 포함됐다. 이상범의 ‘무릉도원도’(1922·위부터 시계방향), 나혜석의 ‘화녕전작약’(1930s), 백남순의 ‘낙원’(1937), 장욱진의 ‘소녀’(1939), 이중섭의 ‘묶인 사람들’(1950s)과 ‘흰 소’(1953∼1954)(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국립현대미술관이 ‘아주 특별한 제안’을 받은 것은 지난 3월. 이건희(1942∼2020) 삼성전자 회장이 개인소장했던 미술품을 기증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별별 추측성 보도가 다 나오던 그때, 혹시나 했으나 큰 기대는 하지 못했던 미술관으로서는 가타부타 토를 달 여지가 전혀 없었다. 조용하지만 빠른 움직임이 이어졌다. 당장 소장품을 확인하는 일부터였다. 총 4회에 걸친 작품실견 뒤 수증심의위원회가 열렸다. 수증을 확정하고 기증확인서를 발급했다. 일사천리였다. 여느 기증품이라면 수개월은 족히 걸렸던 일이다. 연달아 작품을 포장하고 운송·반입하는 일도 진행했다. 지난달 초순이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 수장고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수장고를 조심스럽게 오가며 5톤 규모 무진동차량 18대에 실어나른 미술품은 모두 1488점. 그렇게 긴박했던 운송과정이 모두 끝나고 ‘반입완료’의 사인이 떴다. 4월 23일이다.

눈 아닌 귀로 들은 희귀·진귀작 퍼레이드

그 1488점을 국립현대미술관이 지난 7일 공개했다. ‘세부’라곤 했지만 공개한 내용이 ‘전부 다’는 아니다. 여전히 주요 작품에 한정돼 있는데, 그럼에도 그 면면에선 특별한 게 보인다. 바로 ‘컬렉터 이건희’의 취향이다.

무엇보다 ‘드물고 희귀한’ 작품을 알아본 안목이 도드라진다. 한국 근현대미술작가 238명의 1369점, 해외 근대작가 8명의 119점으로 나뉜 1488점에는 언제부턴가 모습을 감춘, 혹은 어디서도 보지 못한 희귀·진귀작이 대거 포함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포함해 안팎의 전문가가 꼽는 최고작은 이중섭(1916∼1956)의 ‘흰 소’(1953∼1954)다. 소 그림을 많이 그렸던 이중섭의 작품으로도 매우 드문 ‘흰 소’는 지금껏 5점 정도가 전해지는데, 그중 하나가 이건희컬렉션에 들어있었던 거다. 작품은 1972년 이중섭 개인전과 1975년 출판물에까진 등장했으나 이후 자취를 감췄다. 그러곤 50년 만에 다시 존재를 드러냈다.

유영국의 ‘산’(1960·136×211㎝).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 중 유영국은 단일작가로 작품 수가 가장 많다. 회화 20점과 시리즈로 구성한 판화 167점 등 187점이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상범(1897∼1972)의 ‘무릉도원도’(1922)도 마찬가지. 갈색바탕에 짙은 녹색을 드리운 폭 4m에 육박하는 이 청록산수화는 직접 본 사람이 없어 눈이 아닌 귀로만 들었던 작품이다. 제작과 동시에 사라졌던 셈이니 이 역시 100년 만의 귀환이다. 나혜석(1896∼1948)의 ‘화녕전작약’(1930s)도 있다. 한국 근대기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뒤 엄청난 사회적 스캔들을 일으킨 직후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작품은, 수원 고향집 근처의 화녕전 앞에 핀 작약을 소재로 했다고 알려졌다. 일제강점기 1세대 유화가이자 첫 여성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은, 작품 대부분을 소실해 극소수의 몇 점만이 현존했던 터.

“오랜 시간 열정·전문성 가미한 광폭의 시각”

나혜석과 함께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공부한 여성화가로, 이중섭에게 그림을 가르쳤다는 백남순(1904∼1994)의 ‘낙원’(1937)도 귀한 작품이다. 한국 전통과 서양 고전 화법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그림은 그이의 유일한 1930년대 작품으로 가치가 높다. 박수근(1914∼1965)의 ‘농악’(1960s)은 또 다른 의미의 희귀작이다. 박수근 작품에선 매우 드물다 할, 100호에 달하는(162×97㎝) 크기 때문이다. 이보단 좀 작지만 역시 그의 작품으로는 흔치 않은 130×97㎝ 크기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도 컬렉터 이건희의 눈에 들었다.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 박수근 작품에선 매우 드물다 할 크기(130×97㎝)가 시선을 끈다. 이외에도 100호에 달하는(162×97㎝) ‘농악’(1960s)도 ‘컬렉터 이건희’의 픽업을 받았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당장 명품 위주로 수집하려는 일반 컬렉터의 경향을 뛰어넘었다는 점도 독특하다. 명품이 ‘비싼 작품’만이 아니란 걸 간파했던 거다. 이는 1488점을 가름한 작가별 작품 수가 드러내는데. 유영국 187점, 이중섭 104점, 장욱진 60점, 이응노 56점, 박수근 33점, 변관식 25점, 권진규 24점 등과 더불어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기 컬렉션 112점이 그거다. 가히 한 작가의 연대기를 방불케 할 ‘작품 수’라 할 터. 하지만 유영국의 187점에 회화는 20점뿐, 나머지 167점은 시리즈로 구성한 판화가 채우고 있다. 이중섭의 104점에는 회화가 19점, 엽서화가 43점, 은지화가 27점 등. 60점에 달하는 장욱진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회화 35점, 판화 23점, 드로잉 11점 등으로 꾸려졌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장르적 특성도 ‘컬렉터 이건희’의 취향을 드러낸다. 회화 412점, 판화 371점, 한국화 296점 아래 드로잉 161점, 공예 136점, 조각 104점, 사진·영상 8점 등이 골고루 들었다. 이를 두고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한마디로 “동서고금을 망라한 다양성”이라고 정리했다. “오랜 시간의 열정과 전문성을 가미한 광폭의 시각”이란 거다.

김환기 ‘전면점화’ 드디어…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역사’ 다시 써

“소장품의 빈틈을 채웠다”고는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선 특히 의미 있는 작품이 한 점 있다. 김환기(1913∼1974)의 ‘전면점화’다. 그간 꿈만 꾸었을 뿐 언감생심 단 한 점의 소장조차 시도하지 못했던 그 절정기 대표작이 드디어 미술관에 입성한 거다. 그것도 ‘수화 블루’라 불릴 만큼 김환기의 전면점화 중 가장 빛나는 푸른톤의 ‘산울림 19-Ⅱ-73 #307’(1973·264×213㎝)이다.

김환기의 ‘산울림 19-Ⅱ-73 #307’(1973·264×213㎝). 국립현대미술관은 숙원이던 김환기의 전면점화를 이번 이건희컬렉션 기증으로 소장할 수 있게 됐다. ‘수화 블루’라 불릴 만큼 김환기의 전면점화 중에서 가장 빛나는 푸른톤의 작품은 타계 한 해 전에 완성한 것이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김환기가 타계 한해 전에 그린 이 그림과 유사한 작품이 국내 경매에서 낙찰된 적 있다. 2017년 케이옥션 4월 경매에 출품한 ‘고요 5-Ⅳ-73 #310’(1973·261×205㎝)이다. 당시 65억 5000만원에 새 주인을 만났더랬다. 이 한 점만으로도 이미 국립현대미술관 한 해 소장품 구입비용(2021년 기준 48억원)을 한참 뛰어넘는다.

이번 기증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품 1만점 시대를 맞는 감격을 맛봤다. 올해 4월까지 8782점이던 소장품은 이건희의 기증품 1488점이 들어오면서 1만 270점의 리스트를 새로 만들게 됐다. 1969년 개관 이래 52년 만의 일이다. 처음 기증 협의가 있었을 때 윤 관장은 “100점만 와도 좋겠다”고 했더란다. 결국 ‘누락 부분을 채운 것’도 모자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역사’를 다시 쓰는 일까지 컬렉터 이건희가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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