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카탈로그디자인은 괜찮은 돈벌이에 속한다. 나만의 미적 감각을 드러내 색·패턴을 입히고, 빛나는 내 창의력이 녹슬지 않게 할 수 있으니까. 입시미술강사나 아동미술학원 강사도 나쁘진 않다. 내 작업은 아니라지만 내 손끝을 거친 어린 예술가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도 때론 보람이 된다. 같은 ‘미술교육’이라지만 ‘프리랜서’라 할 때는 조금 버겁다. 타이틀이야 근사하지만 ‘방문미술과외’를 알리는 전단지부터 붙여야 한다는 뜻이니까. 밑동을 쪼르르 잘라낸, 나풀나풀 매달린 꼬리에 내 중요정보인 휴대폰번호를 수없이 노출하면서.
그래도 여기까진 희망적인 ‘아르바이트’다. 여전히 미술계에 속해 있다 믿게 하고, 머지않아 진짜 내 자리로 돌아갈 거란 꿈까지 꺾진 않으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필요할 때마다 딱딱 떨어지느냐.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 어쩌랴. 생업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카페·편의점·PC방을 거치고 세차장에도 나선다. 인터넷쇼핑몰이나 물류창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언제든 길에서 마주칠 수 있는, 서로 운이 좋으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는 젊은 예술가들 얘기다. 이 문제를 끄집어낸 데는 계기가 있다. 지난해 7∼9월, 수원시립미술관이 프로젝트를 한 건 진행했다. 젊은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지역연관 청년작가 포트폴리오 수집 사업’이다. 굳이 조건이라면 미술가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작업과 밥벌이를 꿋꿋이 병행하는 작가. 이 과정에서 1980년대에 태어난 다섯 작가가 걸러졌다. 이태강(35), 정덕현(35), 김양우(35), 권혜경(37), 서유진(32)이다.
수원시립미술관 분관인 경기 수원 영통구 아트스페이스 광교에 펼친 기획전 ‘Be 정상’ 전은 그 결과물이다. 작가로서의 삶을 옮겨놓은 회화·조각·설치·영상이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지탱하기 위한 ‘생계아카이브’를 생생하게 소개한다. 47점을 걸고 세웠다.
|
공장 노동자·물류창고 사무직…30대 다섯 작가의 ‘생계형 미술’
정 작가가 공장 안팎을 그린 회화와 오브제를 설치한 전시작은 5점. 공장이 분열하는 모습을 가로 5m에 육박하는 대형화면에 옮기고, 그 아래로 작업에 쓰이는 부품과 노동자의 필수품이라 할 컵라면·캔음료 등을 열거한 ‘분열’(2011)이 그 시작이다. ‘유출’(2012)과 ‘잠수’(2012)는 공장 외형보단 사람에 좀더 집중한 작품들이다. 터지고 녹슨 기계를 그린 그림과 노동자가 쓰는 비품 등이 오브제로 나왔다. 정 작가는 요즘 전시장에서 일을 한단다. 작가의 위치가 아니다. 전시공간을 만드는 설치업자로서다.
|
작가 서유진은 ‘방문미술과외’로 뼈가 굵었다. 2013년 전후라니 얼추 7∼8년. 현실의 그 높은 벽을 작가는, 그만큼이나 높은 천장을 가진 미술관 벽 한 면을 빼곡히 채워내며 표현했다. 예의 그 나풀나풀한 꼬리가 무심히 흩날리는, 방문미술홍보 전단지로 말이다. 타이틀도 ‘생계를 위한: 방문미술 전단지 붙이기’(2013)다. 장당 33원짜리 전단지가 이렇게 ‘작품’이 될 줄은 작가도 몰랐을 거다. 그 벽 앞으로 곱게 채색한 나무의자 셋이 보이는데. 이 역시 작가가 직접 제작해 팔기도 하는 스툴. ‘생계를 위한: 의자 만들어 팔기’(2013)라고 했다. 서 작가는 “사회구조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개인이 겪는 상황과 현실을 보여주는 덩어리”라고 담담히 작품을 소개했다.
작가 김양우는 ‘주경야독’ 같은 생활을 적나라하게 꺼내놨다. 예술가로서의 밤, 생계인으로서의 낮이다. 테마는 ‘67.32㎞’. 이는 김 작가가 서울에서 화성까지 일터를 오가는 거리를 말한다. “편도로 2시간 20여분 동안 작품을 고민할 개인적인 시간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 긍정의 시간 덕에 영상 ‘67.32㎞’(2018), 설치 ‘67.32㎞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2019) 등을 제작할 수 있었다. 김 작가가 일하는 인터넷쇼핑몰과 물류창고의 사무공간을 재현한 설치작품도 눈에 띈다. 책상과 테이블, 컴퓨터가 전부인 ‘온라인쇼핑몰 마케팅 사무직’(2021)과 ‘화물운송회사 사무직’(2021). 모니터에는 작가가 일하는 장면 등을 비춘 8분짜리 영상이 돌고 있다.
|
이외에도 작가 이태강은 타고난 비범과 안정된 평범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남자의 여정을 풀어내며 예술가의 처지를 비유한 ‘비범한 옷’(2021)을 선뵀다. “예술가들은 비범한 옷을 입고 산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그래서 “예술가가 운명처럼 입어야 하는 ‘처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다”는 거다. 고도로 은유화한 스토리 덕에 작가가 빚은 조각 ‘초인의 두상’(2018), ‘말은 바다’(2018), ‘작은 구름덩어리들’(2021) 등에선 잠시 현실을 잊게 하는 시적인 이미지가 흐른다.
작가 권혜경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뛰어들었다. “예술을 거래할 수 있는가”다. 작품이 상품이 돼 사고 팔리는 ‘쇼룸’을 콘셉트로 물리적인 예술시장을 재현했다. ‘재고정리 세일’(2021), ‘신상품 개발과정’(2019·2021), ‘사용설명서’(2021) 등과 함께 운송현장을 상징한 ‘HKK 방호벽’ 연작(2019)도 세웠다.
|
눈치챘겠지만 작가들을 연결하는 주요한 매개이자 키워드가 있으니 ‘Be 정상’이다. 전시는 그 의미를 중의적 또 양가적으로 해석하는데. 우선 ‘Be’(비)는 ‘되다’(to be) 혹은 ‘아니다’(非) 중 무엇으로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앞엣것은 ‘정상에 오르고 싶은 예술가’가 될 테고, 뒤엣것은 ‘정상에 오르지 못한 예술가’가 될 테니까. ‘정상’도 다르지 않다. 꼭대기가 아닌 보통·표준이란 뜻이라면 예술가이기 위해 다른 직업을 전전하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비정상인가’를 묻게 되는 거다.
하지만 방점이 어디에 찍히든 큰 상관은 없다. 전시는 ‘정상과 비정상’을 고민하는 작가들의 이상과 현실을 묵묵히 비출 뿐이다. 결국 다섯 작가를 통해 들여다본 ‘미술계의 적나라한 오늘’이라고 할까. 열정을 키우면 키울수록 배는 곯을 수밖에 없는 상황, 생계형 예술가들은 오늘도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전시는 6월 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