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회장의 소장품을 보관해오던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전국으로 흩어진 ‘이건희컬렉션’이 앞다퉈 전시일정을 내놓고 있다. 6일부터 박수근미술관이 여는 ‘아카이브 특별전’에 걸릴 박수근의 유화·드로잉 18점이 가장 먼저 대중과 만난다(이미지=이데일리 디자인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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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세기의 유산’의 ‘세기의 이동’. 이건희컬렉션이라 불린 미술품 2만 3000여점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일 말이다. 가깝게는 서울 용산구 이촌동부터 멀리는 제주 서귀포시까지, 전국으로 흩어져 갔다. 출발지는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 그간 이건희(1942∼2020) 회장의 소장품을 보관해온 곳이다. 2만 1600여점을 기증받은 국립중앙박물관, 1400여점을 기증받은 국립현대미술관은 말 그대로 ‘비상’이다. 진동이 거의 없는 특수탑차에 실어 옮겨냈는데 이삿짐처럼 차곡차곡 쌓을 수도 없는 ‘귀한 작품’들이다 보니 수십 차례 이동은 보통이다. 그나마 일찌감치 이관작업을 끝낸 국립현대미술관은 기증품 전부를 과천관 수장고에서 보관 중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여전히 이동 중’이다. 박물관 한 관계자는 “이달 말까지 이어질 것”이라며 “규모도 규모지만 소장목록을 만들고 분류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다”고 전했다. 이들 기증품은 박물관 소장품이 모여 있는 이촌동 수장고에 보관한다.
비교적 작품 수가 단출(?)한 지방 공공미술관 다섯 곳에선 일찌감치 ‘귀빈 맞이’가 끝났다. 박수근미술관에 18점, 이중섭미술관에 12점, 전남도립미술관에 21점, 대구미술관에 21점, 광주시립미술관에 30점 등 102점이 삼성 유족 측 발표가 있던 지난 28일 이전, 이미 이관을 마쳤다.
이제 남은 건 ‘개막’. 기증품을 수령한 미술관들이 앞다퉈 전시일정을 내놓고 있다. 그야말로 전국구가 된 이건희컬렉션이 봇물 터지듯 미색 향연을 펼치게 된다.
전국으로 흩어진 컬렉션…의미 없는 행보가 없다‘국민화가’라 불리는 박수근(1914∼1965)의 고향은 강원 양구다. 21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까지 양구에 살았다. 2002년 뒤늦게 작가세계를 기린 군립박수근미술관을 건립하는데. 개관 2주년 기념식에서 뜻밖의 손님을 맞게 된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홍라희(75) 관장이다. 당시 홍 관장은 미술관 주변 사유지를 매입해 자작나무숲을 만들자 제안했더랬다. 그 인연이 진했던 건지 이건희컬렉션은 박수근미술관으로도 향했다. ‘한일’(閑日·한가한 날·1950s)을 앞세워 ‘농악’(1964), ‘아기 업은 소녀’(1962), ‘마을풍경’(1963) 등 박수근의 유화 4점과 드로잉 14점 등 18점이다. ‘농악’은 1965년 ‘박수근 유작전’에 나온 이후 소장처 확인이 안 됐던 작품으로, ‘아기 업은 소녀’는 희소가치가 높아 “돈이 있어도 못 산다” 했던 작품으로 소문만 무성했더랬다. 특히 ‘한일’은 해외로 반출했던 것을 2003년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낙찰받아 국내로 귀환시킨 ‘아픈 손가락’이다. 박수근미술관은 6일부터 ‘아카이브 특별전’에 이들 작품을 걸 예정이다. 기증품 중 가장 먼저 대중과 만난다.
| 박수근의 ‘한일’(閑日·한가한 날·1950s, 캔버스에 유채, 33×53㎝). 해외로 반출했던 것을 2003년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낙찰받아 국내로 귀환시킨 작품이다(사진=박수근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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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국민화가’인 이중섭(1916∼1956). 불운한 생애 중에서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가족과 함께 제주에 머물 때다. 1951년 피란 가 11개월간 머물던 서귀포에서 붓이 절로 움직였던 그때 풍경화 한 점을 그리는데. ‘섶섬이 보이는 풍경’(1951)이다. 서귀포 바다 너머 고즈넉이 자리잡은 무인도 ‘섶섬’을 내다본 작품이다. 짧았던 행복을 더듬는 화가의 붓질은 이후 ‘해변의 가족’(1950s), ‘아이들과 끈’(1955) 등으로 이어졌다. 두 아들과 재회하는 꿈을 포기 못한, 가슴저린 추억의 토막일 터. 이들 이중섭 작품이 제주 이중섭미술관에 새 둥지를 틀었다. 기증작 12점에는 아내에게 띄운 엽서화 3점, 담뱃갑에서 뜯어낸 은종이에 그린 은지화 2점, 수채화 1점, 유화 6점이 이름을 올렸다. 이중섭미술관은 9월 ‘기증 특별전’을 통해 이들 모두를 공개한다.
| 이중섭의 ‘섶섬이 보이는 풍경’(1951, 종이에 유채, 32.5×58㎝). 1951년 피란 가 11개월간 머물던 ‘가족과 행복했던’ 서귀포에서 그린 풍경화다(사진=이중섭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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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 출신 천경자(1924∼2015), 신안 출신 김환기(1913∼1974), 화순 출신 오지호(1905∼1982), 진도 출신 허백련(1891∼1977). 이들 작가의 작품도 ‘귀향’을 끝냈다. 전남도립미술관으로 향한 기증작 21점 중 이들의 작품은 10점. 이외에도 김은호·유영국·임직순·유강열·박대성의 작품 11점이 속해 있다. 당장 눈에 띄는 건 이제껏 봤던 것과는 다른 화풍의 천경자 그림 두 점이다. 흙에 물감을 섞어 종이에 바르는 기법으로 배 위에 온갖 바다생물을 올린 ‘만선’(1971)과 묻어날 듯한 부드러운 질감의 ‘꽃과 나비’(1973)다. 특유의 서정까지 심어낸 오지호의 풍경화 5점에, 전면점화 이전 숱하게 연구한 십자구도를 화면에 그은 김환기의 ‘무제’(1970)도 따라나섰다. 지난 3월에 개관한 전남도립미술관은 겹경사를 맞았다. “상설관을 만들 계획”이라는 미술관은 이에 앞서 9월 ‘컬렉션 전시’를 예고했다.
| 김환기의 ‘무제’(1970, 캔버스에 유채, 121.5×86.5㎝). 전면점화 이전 숱하게 연구한 십자구도를 화면에 그은 작품이다. 신안에서 난 김환기의 이 작품은 고흥 출신 천경자, 화순 출신 오지호, 진도 출신 허백련 등 전라남도에 연고지로 둔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남도립미술관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사진=전남도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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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찾아간 대가들… 바쁜 컬렉션 신고식
미술계에서 대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이인성(1912∼1950), 이쾌대(1913∼1965) 등 두 천재 작가를 필두로 거물급을 대거 배출했는데. 여기에 경북 울진에서 난 유영국(1916∼2002)을 포함하면 거대한 퍼즐이 완성된다. 이들 작가의 수작들이 대구미술관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1934), ‘인물: 남자 누드’(1930s) 등 이인성 작품이 7점, 1970년대 그린 유영국의 ‘산’ 연작이 5점이다. 여기에 이쾌대의 ‘항구’(1960), 서진달의 ‘누드’(1938) 등을 포함해 김종영·문학진·변종하·서동진 등 8명 작가의 21점이 속해 있다. 대구미술관에서 이 모두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건 12월 ‘특별전’을 통해서다. 이에 앞서 현재 열고 있는 ‘대구근대미술제’ 전에도 일부를 선뵐 계획이란다.
| 이쾌대의 ‘항구’(1960, 캔버스에 유채, 33.5×44.5㎝). 칠곡 출신인 이쾌대는 이인성과 함께 대구지역 천재화가로 꼽힌다.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가 되고 성북회화연구소를 열어 미술계 거목들을 키워내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월북했다(사진=대구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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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5점, 오지호 5점, 이응노(1904∼1989) 11점, 이중섭 8점, 임직순(1921∼1996) 1점 등 5명 작가의 30점. 지방으로 내려간 이건희컬렉션 중 작품 수로는 광주시립미술관이 가장 많다. 수도 수지만 1950∼1970년대 작품경향을 대표하는 김환기의 유화, 전통 수묵화부터 ‘문자추상’ ‘군상’ 등을 망라한 이응노의 다채로운 한국화 등 연대기에 포함될 만한 작품이 고르게 포진됐다. 광주시립미술관은 이 특별한 기증작을 개관 30주년을 맞는 내년 3월 공개할 예정이다.
| 오지호의 ‘계곡추경’(1978, 캔버스에 유채, 40.8×53.1㎝). 한국 근현대 화단에서 인상주의 화풍의 대표작가로 손꼽힌다. 미묘한 색감의 변화를 포착한 생기 넘치는 붓 터치로 평생 한국적 인상주의 구현한 오지호의 풍경화 5점이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됐다(사진=광주시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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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미술관들의 바쁜 행보만큼 서울에서도 숨가쁜 일정이 이어진다. 6월 국립중앙박물관이 스타트를 끊는다. 국보·보물급 위주로 열릴 ‘특별전’에는 그간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이건희컬렉션의 주요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1751·국보 제216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1805·보물 제1393호), ‘고려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 등 문화재가 전부 나온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이관작업은 계속되고 있지만 “전시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관계자는 귀띔했다. “6월에 내놓을 국가지정문화재 60건에 대한 수령은 끝낸 상태”라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8월부터다. ‘명품전’이란 타이틀 아래 한국 근현대작품의 ‘핵심작’을 먼저 서울관에 건다.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1950s),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 이중섭의 ‘황소’(1950s) 등이다. 이후 9월 과천관, 내년 청주관에선 서양화의 대표작을 공개할 계획이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9~1920),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의 가족’(1940),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1890s) 등이 오랜만에 조명 아래 빛날 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