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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2001)에서 상우가 연인인 은수에게 하는 질문이다. 어쩌면 은수가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독백일 수도 있다. 사랑에 대한 지고지순한 믿음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중이었으니까. 겨울에 만나 함께 봄을 보내고 여름을 목전에 둔 연인의 마음은 어긋나고, 멀어지고, 변하고 있다. 연인의 마음이 변하는 것이 슬픈 이유는 그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기를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불변’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처음같이 항상, 영원한 것은 피안의 이상향이며, 신의 영역이며, 절대의 범주다. 그럼에도 인간은 사랑을 통해, 황금을 통해, 권력을 통해, 예술을 통해 변치 않는 영원을 꿈꾼다. 피터르 몬드리안(1872∼1944)은 바로 그 너머를 바라봤던 작가다.
몬드리안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암스테르담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1919년 파리로 이주했다. 1910년대 유럽, 특히 프랑스에선 1차대전(1914∼1918)의 전화 속에 새로운 미술을 향한 갈망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인류가 진화를 거듭하며 최고의 문명을 꽃피웠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벨 에포크(Bell Epoque·19세기 말부터 1차대전 발발 전까지 ‘아름다운 시절’을 일컫는 말)의 정점에서 벌어진 전쟁은 문학과 미술의 감수성도, 과학기술과 산업발달의 냉철한 이성도 광기의 잿더미에 묻어버렸다. 당시 유럽 지식인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연히 세상은 바뀌어야 했고, 그 한가운데서 예술은 기존 가치관과 윤리관, 문화적 성취에 의문을 품었다.
1차대전 전화에 묻힌 감성·이성…새 미술 향한 갈망 싹터
파리로 이주한 몬드리안 또한 새로운 질서와 법칙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 첫발이 1917년 동료들과 주도한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란 기하학적 추상주의다. 신조형주의란 말은 사실 번역으로 되레 어려워졌는데, 신조형주의에서 ‘조형’은 한마디로 조각·캔버스를 포함한 회화의 3차원적 형태를 뜻한다. 3차원적 형태는 유럽 미술의 오랜 숙제였다. 르네상스시대에 원근법이 발명된 이후 수많은 예술가는 3차원의 공간과 사물을 어떻게 2차원의 평면에 사실적으로 표현할지 고민해왔다. 자연과 최대한 가깝게 묘사해 회화의 평면이 실재처럼 느껴지도록 환영을 잘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가의 미션이었다. 지금 사는 세상과 가장 닮은 예술을 만드는 것만이 진실을 드러내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는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들이 나온다. 그들에게는 “장밋빛 벽돌로 지은 예쁜 집인데, 창에는 제라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어요”라고 말해봤자 그 집이 어떤지 생각해내지 못한다. “크기는 30평이고, 지하철역에서 800m쯤 떨어져 있고, 가격은 3억원이에요”라고 말해줘야 비로소 “알았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어린 왕자의 말처럼 숫자 말고는 본질을 보지 못해서? 몬드리안이라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집의 색, 창가의 제라늄, 지붕의 비둘기는 쉽게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집의 크기와 높이, 지도상 위치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또 가격은 근처에 좋은 학교가, 공원이, 편한 시장이 있는지 등을 함축한다. 함축해서 가장 보편적인 표기단위인 숫자로 드러내는 것, 그 안에서 조화와 균형을 조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몬드리안이 추구한 보편적 세상의 진실이며, 예술이 추구하는 유토피아의 방향이었던 것이다.
몬드리안의 추상은 바로 그 과정에서 나왔는데, 1911년부터 1912년에 걸쳐 그린 3개의 나무시리즈를 보면 한눈에 드러난다. 몬드리안은 단순히 나무를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나무의 변치 않는 본질적 속성을 그리려 했다. 가장 먼저 그린 ‘회색나무를 위한 스터디’(1911)에는 여전히 나무의 잔가지와 주변 풍경이 남아 있다. 실제 모델인 나무를 바로 알아챌 수 있을 정도다. 두 번째 ‘회색나무’(1911)는 이보단 좀더 추상화했다. 잔가지 묘사는 사라지고 나무의 형태를 결정짓는 굵은 가지들이 화면을 조형적으로 나누고 있다. 마지막 ‘꽃피는 사과나무’(1912)에서는 가지의 팔 벌린 형태가 선으로 남았고 그 사이를 색으로 채워 조화롭게 자리잡았다. 하지만 마지막 나무는 1911년 몬드리안이 처음 보고 그린 그 나무가 아니다. 나뭇가지가 선을 만들고 그 사이 공간을 색면으로 채우는 세상의 모든 나무인 것이다. 정확하게는 ‘세상의 모든 꽃피는 사과나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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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의 진실 추구…캔버스 넘어 패션·건축에까지 영향 미쳐
이처럼 신조형주의 회화에서 묘사하는 모든 대상은 선과 색, 면으로 함축된다. 세상의 모든 곳에서 찾아낼 수 있는 선·색·면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의 보편적 언어며, 가장 순수하게 남은 회화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몬드리안의 가장 유명한 작품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1930)은 바로 그 사조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과연 몬드리안의 새로운 질서와 법칙이 그가 의도한 대로 세상의 본질을 밝혀 조화와 균형을 가져왔을까. 이별 후 다시 봄이 돌아왔을 때 결국 상우가 ‘사랑은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은수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던 것처럼, 몬드리안 또한 피할 수 없는 변화 속에 적응해가야만 했다. 동료들과 조형에 대한 의견 차이로 ‘데 스테일’을 탈퇴했으며, 2차대전의 전운이 드리운 1938년 유럽을 떠나 뉴욕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혹독한 세계대전으로 그가 추구했던 정명하고 조화로운 유토피아는 또다시 참화 속에 부서지는 운명을 맞이했고, 뉴욕에 정착해선 즉흥적이고 변덕스러운 음악인 재즈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장 엄숙하고 완벽했던 시절의 그의 작품을 여전히 읽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 때문일지 모르겠다. 종교와 과학, 예술과 문화, 사회제도와 국가시스템을 통해 인류는 끊임없이 불변의 조화, 균형의 유토피아를 꿈꿔왔고, 이는 인류 역사에서 공통숙제로 남아 있다. 이 숙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는 몇 번의 실패나 전쟁으로 쉽게 꺾일 게 아니며, 인간은 역사의 순간마다 새로운 도전의 의지를 불태울 것이다. ‘페르 아스페라 아드 아스트라!’(Per Aspera Ad Astra·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
△이수연 학예연구사는…
1979년 생. ‘문자보다 이미지’였다. 이미지의 가능성, 이미지를 읽어내는 방식에 자꾸 관심이 갔다.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한 뒤 방향을 틀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백남준 퍼포먼스 연구’란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후 미술전문기획사 사무소(SAMUSO) 등을 거쳐 200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면서 전문영역이 선명해졌다. 무빙이미지·영화·인터넷 등 미디어기술의 발전이 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고든 일이다. 내친김에 미국 코넬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미디어기술을 입은 시각문화가 끝없이 진화하는 현장을 학술연구와 연결하는 일에까지 욕심을 냈다. 백남준 탄생 90주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올 가을에 열 ‘백남준 효과’ 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