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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리될 운명이었다.”
숱한 고난과 시련을 겪고 먼 길을 돌아온,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어떤 상황을 맞닥뜨릴 때 이렇게들 말한다. ‘소나무가 무성한 언덕’이라 송현(松峴)이라 불린 ‘송현동’이 그렇다. 서울 종로구 송현동 48-9번지. 이만큼 사연이 많은 땅도 드물고, 이토록 오래 놀려 둔 금싸라기 땅도 드물다.
이건희미술관, 좀더 정확하게는 이건희(1942∼2020) 전 삼성전자 회장의 소장품 2만 3000여점을 상설 전시할 ‘이건희 기증관’(가칭)을 짓는 부지로 송현동이 최종 낙점됐다. 2027년 완공과 개관을 목표로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가 손을 맞잡고 ‘1000억원 규모의 삽질’을 시작한다. 지난 7월, 2파전을 예고하고 용산과 붙인 싸움이었지만 치열한 승부는 없었다. 되레 “미리 다 써놓은 시나리오”라는 비난만 자초했다. 어찌 보면 상징성·인프라·접근성 등이 압도적이었다는 얘기도 된다. 그렇다면 뭐가 ‘그리될 운명’이란 건가. 24년 전 이 부지에 삼성미술관이 들어설 뻔했기 때문이다.
110여년 간 ‘아무것도 못한’ 금싸라기 땅
3만 7141㎡(약 1만 1235평). ‘한양전도’(1780)에도 선명한 송현동 부지는 조선시대 왕족과 세도가, 고관대작의 집이 차례로 들고 났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빼앗긴 땅’이 됐는데 해방 이후에도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주한미국대사관이 직원숙소로 쓰겠다고 들어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반세기를 점령했던 그들이 철수에 임박하자 비로소 ‘우리’ 차지가 됐다. 1997년 삼성문화재단이 주한미국대사관으로부터 매입키로 한 건데, 바로 ‘삼성미술관’ 자리로 낙점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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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삼성에게는 첫 선택이 아니었다. 1995년 홍라희(75)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 호암미술관장으로 취임한 뒤 종로 일대에 현대미술관 터를 물색했는데, 운현동 어디쯤이었다. 그런데 그 부지가 미술관 자리로 난항을 겪게 됐고, 새롭게 찾은 데가 ‘송현동 부지’였던 거다. 하지만 ‘삼성미술관’은 그곳에 들어서지 못한다. 1997년 때마침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지고 환율이 폭등해 계약금 1400억원이 2400억원까지 뛰어오르자, 위약금을 물면서까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러자 이번엔 삼성생명이 나섰고, 사들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11년간 각종 규제에 묶여 아무것도 못해 보고, 2008년 한진그룹(대한항공)에 팔아버리고 만다.
부지 확보에 적잖은 시간…기증관 외 용도는?
이제야 운명이 바뀌나 싶은데, 갈 길이 그리 평탄해 보이진 않는다. 여전히 제거해야 할 걸림돌, 풀어야 할 과제가 보이는 거다. 일단 ‘부지 문제’다.
‘이건희 기증관’ 결정·설립에 주무부처인 문체부가 굳이 서울시와 손을 잡은 건 현재 송현동이 ‘서울시 사유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6월 “이 땅을 매입해 역사문화공원을 만들겠다”고 선언했고, “헐값에 못 넘긴다”고 반발한 대한항공과 팽팽히 맞섰더랬다. 1년여 실랑이 끝에 지난 4월 난 결론이 이렇다. 대한항공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이 땅을 팔고, LH는 이 땅을 서울시 사유지 중 ‘어떤 곳’과 교환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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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문체부와 서울시가 체결한 ‘이건희 기증관 건립을 위한 업무협약식’의 핵심은 이 부지의 소유권을 하루빨리 명확히 하는 일에 양쪽이 긴밀히 협조하자는 데 있다. 사실 지난 4월 이후 지금까지 진척된 내용이라면, ‘LH가 송현동 부지를 사들이면, 서울시가 삼성동 옛 서울의료원 남쪽 부지와 교환한다’는 것뿐이다. 서울시로의 소유권 이전은 내년 상반기로 내다보는데, 서울시가 이 부지를 확보하면 문체부가 나서게 된다. 기증관이 들어설 땅(3만 7141㎡ 중 9787㎡ 약 2960평)만큼 서울 내 국유지를 골라 서울시에 내주고 맞교환하자고. 이 고차방정식 덕에 별도의 부지 구입비용 없이 1000억원 규모의 기증관 건립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거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1만점 시대’는 없던 일?
‘이건희 기증관’의 방향은 문체부 소속 독립 미술관으로 정해졌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더해 거대한 국립기관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다. 이 회장의 기증품 대부분(지방 미술관에 분산된 102점을 제외한 2만 3079점)이 기증관에 집결할 예정이라 소장품 규모로도 단연 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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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이미 기증한 소장품이 다시 빠져나가면서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거란 데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이건희컬렉션 소장품 관리를 최우선 업무로 배정하고 미술관 인력·예산 대부분을 배치한 상태. 게다가 이번 기증품으로 ‘소장품 1만점 시대’를 선언한 미술관의 위상도 재정립해야 할 판이다. 이와 관련해 앞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새로운 미술관으로 옮겨가기 전까진 소장품의 관리·운영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며 말을 아꼈더랬다. 미술계 한 전문가는 “규모나 가치가 월등하다 해도 한 개인의 소장품만으로 대한민국 대표 뮤지엄의 위치가 바뀔 수 있는 빈약한 인프라가 못내 씁쓸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를 의식한 듯 이날 업무협약식에서 김영나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 위원장은 “수평적인 체제로 (기증관의) 독립적인 미술관 역할”과 “(세 기관의) 원활하고 유기적인 협력”을 강조했다.
미술관이 나아가는 세계적인 추세, 또 유례가 없는 체계를 거스른 결정이란 점에도 답을 만들어야 한다. 다수의 전문가는 “한국의 고미술과 근현대미술, 서양미술이 혼재된 소장품만으로 미술관의 체계를 잡는 게 무리”라며 “이미 시대별로 분리기증한 기증자의 의사에도 반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지역문화 분권을 고려하지 않은 수도권 밀집형 결정이란 비판에도 딱히 대안은 없다. 이날 황희 문체부 장관은 “해외 전시와 국내 순환 전시”로 일단 가름했다. 이어 “지방의 문화향유권을 위해 내년 예산이 온전하게 흐를 수 있도록 예산구조를 편성하고 있다”고 에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