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호의 그림&스토리]<25>점점이 박힌 그리움, 하늘의 별이 됐구나

▲김환기가 찍은 점의 의미
사랑한 아내·달·도자기 한데 담은 '항아리를 인 여인'
고국 그리움 녹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점 하나에 사랑, 점 하나에 추억, 점 하나에 그리움…
한점 한점 고이 찍어 한국미술 별이 돼 총총히 빛나
  • 등록 2021-07-30 오전 3:30:00

    수정 2021-07-30 오전 3:30:00

김환기가 1970년에 그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먹빛에 가까운 짙은 푸른색 점을 무수히 찍은 전면점화로 1970년대 김환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점의 크기와 그를 둘러싼 색채의 농담·번짐의 차이로 마치 별빛이 부유하는 밤 풍경 같은 우주적 공간감을 던져준다. 작품은 이후의 전면점화에도 중대한 분기점이 됐는데, 흰 선이나 활형의 곡선을 들이기도 하고, 특유의 깊은 푸른색은 물론 주황·빨강·노랑 등 색조의 다양성도 꾀했던 거다. 뉴욕에서 제작한 작품은 서울로 보내져 그해 ‘제1회 한국미술대상’을 받았다. 캔버스에 유채, 236×172㎝,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 도시를 꼽으라면 어디를 꼽을까요. 당연히 현재의 중심은 미국의 뉴욕입니다. 구게하임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세계 최고의 미술관이 모여 있고 브로드웨이에서는 매일 수십 편의 뮤지컬과 셀 수 없을 만큼의 각종 연주와 연극이 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뉴욕이 예술의 중심 도시가 된 것은 2차대전 이후이고 그 이전은 프랑스 파리였습니다. 지금도 파리는 유럽 제일의 문화예술 도시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문화예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파리와 뉴욕, 이 두 곳 모두에서 인상적인 활동을 한 한국인 화가가 있었으니,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 수화 김환기(1913∼1974)입니다. 김환기가 이룬 한국미술의 성과는 대단하지만 그 성취가 혼자만의 노력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아내이자 예술적 동지인 김향안(1916∼2004)과 공동으로 이룬 업적이라 할 만해서지요. 그런 김향안을 김환기는 그림으로 어떻게 남겼을까요. 1950년대 김환기의 대표적인 ‘달항아리 시리즈’에 등장하는 여인의 모델이 된 이가 바로 김향안입니다. 그 시기 대표작 중 하나인 ‘항아리를 인 여인’(1950s)도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저고리 없이 옥색 치마만 입은 여인이 달항아리를 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매병 한 점을 품에 안고 돌담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뒤로 나무 한 그루가 여인을 지켜보듯 서 있고 그런 모든 풍경을 보름달이 환히 비추고 있습니다. 단발머리의 여인은 둥근 얼굴로 눈이 크고 코도 오뚝한 미인형으로, 김향안의 실제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아내이자 예술적 동지인 김향안 모델로 한 그림

작품에 도자기를 두 점이나 등장시킨 것으로도 미뤄볼 수 있듯 김환기는 소문난 도자기 애호가였습니다. 시골 안좌도의 전답을 팔아가며 백자, 특히 달항아리를 수집했습니다. 집안을 가득 채운 도자기 덕에 자신은 도자기 속에서 산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지요.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추구한 한국적 미의 결정체가 도자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평생 지우였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혜곡 최순우(1916∼1984)와의 깊은 교류도 한국적 미에 대한 안목과 도자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공유했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여인에게 도자기를 두 점이나 이고 안게 한 것도 순박하고 어진 한국적 미를 구현한 도자기와 여인의 내면적 아름다움을 동일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여인의 치마색은 고려청자의 은은한 비취색과 흡사합니다. 뒤에 선 나무는 김환기 자신을 상징했을 것입니다. 김환기는 근원 김용준(1904∼1967)이 살던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수화와 향안이 사는 집’이란 뜻의 수향산방으로 고쳐 살았는데 이 집 마스코트였던 감나무를 매우 사랑했고, 정원에서 꽃과 나무 가꾸기도 좋아했습니다. 나무와 대화한다는 뜻의 ‘수화’(樹話)란 호를 스스로 만들어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달 또한 무척 좋아했는데, 취흥이 도도해지면 우물가에 항아리를 들고 마당에서 춤을 추면서 “달이 뜬다, 노시산방에 달이 뜬다”고 노래할 만큼 김환기에게 달항아리와 달은 동일체였습니다. 그만큼 작품은 단순한 소재뿐이지만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한데 담아낸 것입니다.

김향안의 결혼 전 본명은 변동림으로,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이상과 함께 보낸 시간은 고작 3개월에 불과했고, 이상이 폐결핵과 일본감옥 수감으로 요절하면서 슬프게 막을 내렸습니다. 얼마 뒤 김환기의 적극적인 구애가 있자 결혼을 결심하는데, 이상과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아 서류상 미혼이던 변동림이 당시 딸이 셋이나 있던 김환기와 결혼을 하겠다니 주변에선 반대가 심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감행을 합니다. 이때 변씨와의 모든 인연을 끝내겠다는 의지로 김향안으로 개명을 한 것입니다. 김씨는 김환기의 성이고, 향안은 김환기의 아호니 김환기와 함께하겠다는 결심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김환기의 아내가 된 후로 김향안은 김환기의 뮤즈이자 친구이고 후원자이자 조력자였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손을 벌려본 적 없는 김환기를 위해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고 세 딸을 공부시키고 돌보는 일도 김향안의 몫이었습니다. 미술시장의 중심인 파리에서 활동하고자 한 김환기를 위해 먼저 프랑스어를 공부해 작품 목록을 들고 파리로 가 화랑을 돌며 파리생활의 터를 마련한 것도 김향안이었습니다. 이후 파리에서 4년간 김환기는 그림을, 김향안은 미술사 등을 공부하는데, 밥은 굶어도 담배는 못 끊겠다는 김환기를 위해 담뱃값을 빌리러 다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김환기 ‘항아리를 인 여인’(1950s). 돌담을 배경으로 백자를 이고 안은 여인을 그린 작품으로, ‘여인과 달과 항아리’란 타이틀로 전해지기도 한다. 당시 김환기의 주요 소재였던 달과 항아리, 여인과 나무를 한 캔버스에 모두 들였다. 사실적 묘사에 상징성·기호성을 더해 이후 추상성의 단초를 마련한 동시에 풍부한 서정성까지 지닌 작품이 됐다. 캔버스에 유채, 91×71㎝,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하지만 귀국 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김환기가 홍익대 미대에서 교수와 학장을 지냈지만 당시 학교 형편이 좋지 않아 월급이 1년 동안 지급되지 않기도 했고, 그림값을 1급으로 쳐주지 않으면 팔지 않겠다는 김환기의 고집과 나중에는 모든 그림을 팔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가정형편이 영 신통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김향안은 글솜씨를 발휘해 매체에 각종 글을 쓰며 김환기를 위해 책 표지화라도 얻고자 출판사를 들락거리기도 했습니다.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김환기 그림은 뉴욕에서 완성됩니다. 1964년 브라질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뒤 귀국하지 않고 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초기 1년은 록펠러재단에서 후원을 받아 정착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변방의 화가에게 자리를 쉽게 내줄 뉴욕이 아니었습니다. 김환기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말을 처음으로 했을 만큼 한국적 미의 추구를 세계가 알아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를 표현하는 조형언어는 나라마다 다르다는 점을 깨닫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생활은 늘 궁색했고 아파도 병원조차 제대로 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추상의 세계로 깊이 나아갔고 예술적 고뇌와 한국의 벗, 산천의 그리움을 녹여낸 전면점화가 연달아 탄생합니다. 대표작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가 그중 한 점입니다.

작품은 뉴욕으로 떠난 뒤 한국화단에서 잊혀질 무렵인 1970년 한국일보사에서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해 대상을 받았습니다. 이미 여러 미술전에 심사위원 등으로 나섰던 김환기 입장에서는 공모 자체가 말도 안 됐지만, 초대 대회에 권위를 높여 달라는 주최 측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자신이 갈고 닦은 뉴욕에서의 성취를 고국에 보여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이전의 반추상화에서 화면 전체를 점으로만 찍은 추상화로의 변신을 완벽하게 이룬 이 그림은 당시 미술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에는 또 한 명의 인물이 나옵니다. 절친이자 존경했던 시인 김광섭(1906∼1977)입니다. 작품명은 김광섭이 쓴 시 ‘저녁에’(1969)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당시 일기에는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라고 적어놨습니다. 그후 김환기는 1974년 사망할 때까지 우주적 연대로 확장한 대작의 전면점화를 다수 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열정적인 활동이 건강에 무리가 돼 목 디스크가 심해졌고, 치료를 위해 수술한 뒤 회복 도중 침대에서 떨어진 후유증으로 결국 타계했습니다. 수많은 점을 찍으며 별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김환기는 결국 스스로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됐던 겁니다.

남편을 여의고 30년을 더 산 김향안은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정리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회고전을 추진하고 파리와 뉴욕, 서울에 환기재단을 연달아 설립했으며,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도 세웠습니다. 김환기와 김향안, 또 김광섭까지. 이제는 별이 돼 만나볼 수 없는 이들이지만 그들이 있어 한국미술의 밤하늘에는 아름다운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습니다.

※김광섭과 김환기

문예지에 화문을 자주 발표하고 ‘글과 그림이 다 되는 작가’란 말을 들었던 만큼 김환기는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당연히 시인들과의 교류도 돈독했는데, 김광균·서정주·조병화·김광섭 등과 가깝게 지냈다. 이들과의 친분은 작품에도 종종 반영이 됐고 서정주의 시 ‘기도 1’(1954)의 전문을 실은 ‘항아리’(1955)란 그림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보다 대중에 더 잘 알려진 관계의 작품은 김광섭의 시 ‘저녁에’(1969)가 모티프가 된 전면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다. 이 시 중 마지막 두 줄에서 따온 시구로 작품명을 삼은 그림은 마치 시인에 헌정한 듯하다. 일고여덟 살 위의 김광섭과 김환기는 서울 성북동 이웃사촌이었다가 김환기가 뉴욕으로 건너간 이후로는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 작품이 잘못 전달된 부고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70년 갑자기 전해진 김광섭의 사망소식에 비통해하던 김환기가 시 ‘저녁에’를 메모한 뒤 탄생시킨 그림이었던 것. 어쨌든 김광섭은 살아 있었고, 1974년 김환기가 61세로 먼저 세상을 떠난 뒤 3년을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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