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그림으로 日체제 선전한 박수근…전쟁미술제 참가도[박수근 행적 의혹②]

춘천·평양서 알려지지 않은 행보 밝혀
"개인전 못한 화가" 알려진 사실 달리
일관료 도움으로 춘천서 두 차례 열어
평양선 친일잣대인 전쟁미술제 참가도
배원정 박사 "한 작가에 대한 평가에
답 정해 놓고 접근하는 건 위험한 일…
선택을 강요 당한 현실은 고려해야"
  • 등록 2022-07-26 오전 12:01:10

    수정 2022-08-01 오전 10:36:27

1965년 작고하기 두 달 전의 박수근. 서울 전농동 집에서 찍은 것이다. 양구군 박수근미술관에 전시한 사진을 다시 촬영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965년 5월 6일. 51세 화가 박수근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기사가 일제히 일간지에 실렸다.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불운했던 예술가’의 생애를 축약한 한 줄 소개는 다르지 않았다. “생전 개인전을 갖지 못한 화가”라는 거였다. 다섯 달 뒤 그이의 아내가 남편이 남긴 그림 79점을 어렵게 모아 연 ‘유작전’에서조차 ‘첫 개인전’이란 동정 어린 수식이 붙었으니까.

가난하지만 성실했던 화가에 얹은 안타까움은 56년이 흐른 뒤에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연 박수근의 대규모 회고전 ‘봄을 기다리는 나목’(2021년 11월 11일∼2022년 3월 1일)에서 명시한 작가소개에도 “지금까지 박수근은 생전에 개인전을 한 번도 열지 못한 화가로 알려졌고”란 대목이 나온다. 실제로 1962년 서울 용산 주한미군사령부 도서관에서 열린 ‘박수근 개인전’을 설명하던 중에 나온 이 언급은 팩트보다 ‘마음’이 가는 작가라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팩트’도 명확하지 않긴 마찬가지다. 박수근이 태어나고 묻힌 양구에 2004년 개관한 박수근미술관이 게시하고 있는 작가연보까지 말이다. 1962년 경기 오산 주한미공군사령부 도서관에서 열린 ‘박수근 특별초대전’을 설명하며 “규모는 작으나 박수근 생애 첫 개인전이나 다름없음”이라고 쓰고 있으니까.

이제껏 누구도 확신하지 못한 그 ‘박수근 첫 개인전’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 열린 건가. “박수근은 춘천에서 1937년과 1938년 두 번의 개인전을 개최한 것으로 최종확인된다”는 주장은 바로 그 틈에서 나왔다. 박수근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미스터리하다고 할 ‘춘천·평양시절’의 시작이다.

일본 관료 중심 사진동호회, 첫 개인전 후원

배원정 홍익대 미술사학 박사(41·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가 박수근 일생의 마지막 퍼즐을 맞춰낸다. ‘신예 화가 박수근의 등단: 춘천과 평양에서의 초기 미술활동을 중심으로’(‘미술사논단’ 제54호 2022·상반기)란 논문에서다. 고리는 박수근 일대기에서 빠져있던 부분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사실 그랬다. 가난으로 가족이 모두 흩어진 뒤, 1935년 박수근 홀로 춘천으로 이주한 것까진 알려진 사실이다. 그해를 국립현대미술관은 “박수근 홀로 춘천으로 가서 지냄. 강원도청 사회과장 미요시 이와키치와 양구공립보통학교 시절 은사인 오득영 도움을 받으며 근근이 생활함”이라고, 또 박수근미술관은 “홀로 춘천에 가서 최악의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 그림에 정진함”이라고 각각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배 박사는 그 행간에서 박수근에게 당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미요시 강원도청 사회과장’을 불러낸다. 그가 “고관들에게 그림을 팔아주기도, 개인전을 주선하기도 하는 등 박수근이 화가로 성장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는 거다. 그중 하나가 춘천의 사교모임 소양구락부에 박수근을 소개한 일이다. 당시로선 고급취미였던 이 사진동호회는 일본인 관료가 대부분이었는데, 1937년 7월 자신들의 작품발표회와 함께 ‘박수근 청년의 개인전을 결정했다’고 발표를 하게 된다. 배 박사는 “전무후무한 이 사건을 통해 박수근 최초의 개인전이 춘천 소양구락부의 후원으로 열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이후 1938년 10월 춘천에서 두 번째 개인전도 연다. 배 박사는 “두 번째는 소양구락부와 관련이 없어 보인다”면서도 이 소식을 보도한 기사(‘조선신문’ 1938년 10월 25일자)가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차례 입선한 견실한 청년화가”로 박수근을 소개한 대목은 주의를 끈다고 했다.

하지만 더 큰 궤적은 이후 평양에서 그려진다. 춘천에서 인연을 맺은 미요시가 평남도청 사회과장으로 옮겨가면서 박수근을 사회과 서기로 취직시켜준 일이다. 이 역시 세상에는 ‘1940년 평안남도 도청 사회과 서기로 취직해 홀로 평양으로 이주함’이라고만 알려졌던 터. 우선 배 박사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수근이 면서기도 아닌 도청서기로 취직한 부분은 이해가 어렵다”고 단언한다. 과연 ‘도청서기’ 박수근이 했던 일은 무엇이었나.

‘종이연극’ 그린 평양서 두 차례 전쟁미술제 참여

“청빈함을 감수하지만 예술에 포로가 된 청년과 그 순수함에 내다보고 직을 내주어 재능을 발휘하도록 노력한 과장과의 훈훈한 화제가 있다. 조선 강원도 출생의 박수근과 평남도청 사회과 미요시 과장이 그 주인공이다.”

‘훈훈한 인정미담: 과장과 청년화가’란 기사가 실린 ‘아사히신문’ 1939년 8월 15일자 5면.


‘아시히신문’ 1939년 8월 15일자 5면. ‘훈훈한 인정미담: 과장과 청년화가’란 제목이 달린 기사는 여느 미담의 유사한 시작이다. 하지만 때는 일제강점기. 아니나 다를까. 뒤이은 내용이 단순치 않다. “작년 가을 평남도에 전출한 미요시 과장의 발의안으로 최근 평남도정동연맹에서 종이연극을 작성하게 되어 그 일에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던 중 미요시 과장은 즉석에서 박수근을 추천하였다.”

슬쩍 지나치면 그런가 보다 넘어갈 수도 있을 이 기사는 사실 엄청난 내용을 품고 있다. 먼저 ‘평남도정동연맹’이 걸린다. 이는 국민정신총동원 평안남도연맹을 의미하는데,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제는 전시동원정책을 추진하려 국민정신총동원령을 발동했던 거다. 그중 박수근이 담당한 종이연극은 일본어를 모르던 농어촌주민에게 그림으로 전달하던(연사를 따로 둔) 이른바 프로파간다(선전)였다. 배 박사는 “국책 종이연극은 전시체제기 제국 일본이 추진한 거의 모든 정책을 포함한다”며 ‘징병제 선전’ ‘군사사상보급’ ‘근로보국’ 등 전방위로 뻗쳐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어 박수근이 종이연극뿐 아니라 “선전활동에 필요한 그림의 대부분을 맡아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해다.

논문이 꺼낸 평양 행적은 한 가지가 더 있다. 박수근이 1942년 조선총독부 후원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일하는 가족’을 출품해 입선한 데 이어, 1944년 평안남도총력연맹 주최 ‘결전총력미술전’에는 ‘일하는 여자’로 4등을 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박수근은 전쟁미술제에 두 번 참여했다는 얘기다. 전쟁미술에 나섰는지 여부는 현재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미술가들의 ‘친일’을 가름하는 중대한 잣대다.

배 박사의 근거대로라면 ‘친일 예술가’의 범주에서 박수근은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배 박사는 “어느 한 작가에 대한 평가에 답을 정해놓고 접근하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한국근대미술사의 경우 미발굴자료가 많고, 사람 기억에 의존한 구술채록은 분명 한계가 있어 설익은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거다. 다만 “그 시절 화가들은 전쟁미술에 가담했음이 ‘이미’ 밝혀졌거나 ‘아직’ 밝혀지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지 모른다”며 “친일을 했다 아니다란 흑백논리보다 일제강점기 미술가라면 ‘전쟁미술’ 혹은 ‘징용’이란 척박한 선택에 놓일 수밖에 없던 현실에 대한 이해가 먼저”라고 덧붙였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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