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구수정, 베끼기 등으로 넘치는 법안에 자성·비판…대안은

20대 의원발의법안 벌써1만5000건…회기마다 급증세
김세연 “양적 팽창에 질적 성장은 훼손”…유인태 “의원들, 염치 없어”
시민단체 등의 양적평가 지양·법제실 역할 강화·국회 역할 근본 고민 등 ‘제언’
  • 등록 2018-11-15 오후 5:52:36

    수정 2018-11-16 오후 2:10:52

국회의원 입법의 질적 향상을 위한 토론회(사진=원혜영 의원실)
[이데일리 김미영 기자] 1만5249건. 2016년 5월말부터 15일까지, 20대 국회 들어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 수다. 20대 국회는 아직 1년 반 남았는데, 발의된 법안만 따지면 정확히 20년 전인 15대 국회에서 발의된 1144건의 10배를 훌쩍 넘어섰다.

국회의원들이 내놓은 법안은 폭증했지만, 질적 제고는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고 있다. 보다 못한 5당 중진들이 뜻을 모아 의원 입법의 질적 향상 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언론·시민사회 평가잣대로 법안 발의 폭증…내실은 ‘글쎄’

원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날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토론회 인사말에서 “법안 발의로 표현되는 입법활동의 양적성장은 그 자체로 의미 있지만 이젠 질적 성장을 꾀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도 “법안의 양적 팽창 속에 질적 성장은 훼손되고 있지 않나, 양에 매몰돼 질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고 토로했다.

특히 17대 국회에서 18대 국회로 넘어가면서 시작된 법안 발의 ‘남발’ 행태는 사실상 언론과 시민단체가 조장했다는 지적이 많다. 의정활동을 발의 법안 갯수로 ‘정량평가’하면서 의원들이 앞다퉈 법안을 내는 분위기가 됐다는 것이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정기국회 동안 법안 100건을 내라는 오더를 받았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쏟아지는 법안에 알맹이가 부족한 경우도 적잖다. 한자어를 한글로 바꾸는 등의 단순자구수정 법안, 일몰 연장 법안, ‘베끼기’ 법안, 지난 회기 폐기법안의 재활용 법안 등이다.

실제로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31일 “일본식 한자어인 ‘당해’를 보다 알기 쉬운 표현인 ‘해당’으로 변경하려 한다”면서 관련 용어를 고치는 내용의 법안을 42건 대표발의했다. 박 의원 측은 “언론인이었던 의원이 법률 용어가 어렵다는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가져왔고, 한글날에 맞춰 발의하려 했는데 늦어졌다”고 설명했다. 황주홍 민주평화당 의원도 ‘보장구(保障具)’를 ‘장애인 보조기구’로, ‘시방서(示方書)’를 ‘설명서’로 각각 고치는 내용 등의 법안을 잇달아 냈다. 공교롭게도 박 의원과 황 의원은 지난해 법안 발의 1, 2등을 다퉜던 사이다.

오제세 민주당 의원은 연말로 끝나는 각종 특례, 세제혜택 등의 일몰기한을 연장하는 법안을 지난 9월부터 20여건 쏟아냈고, 김종회 평화당 의원은 “법령정비 차원에서” 존속 필요가 없어진 특례 등을 폐지하는 내용의 법안을 찾아 냈다.

이외에도 폭염이 기승이면 폭염대책법안, 포항 지진이 난 뒤엔 지진재해대책법안 등 현안 따라 비슷한 내용의 법안이 꼬리를 물고 발의되기도 했다. 유인태 국회사무총장이 “14대 때엔 비슷한 내용의 법안을 내는 게 염치 없는 짓이었다”며 “법안 심의 때 토론하면 되는 것을, 너도나도 의원들이 뻔뻔해졌다”고 꼬집을 정도다.

가결율 한자릿수… “국회 역할에 대한 근본적 고민 필요”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국회입법조사처와 참여연대, 바른사회시민회의 등 각계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법안 발의가 급증하면서 나타나는 제일 큰 부작용은 비효율성이다. 17대 국회까지 13~20%였던 의원 발의 법안의 본회의 가결율은 18대에서 5.7%, 19대에선 7.3%를 기록했다. 전학선 한국외대 교수는 “의원안이 정부안보다 현저히 가결율이 낮은 건 의원입법이 비효율적이란 걸 보여준다”며 “의원입법 증가로 국회에서 법안을 제대로 검토, 심의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법안 발의 남발을 막고, 효율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먼저 언론과 시민사회 등에서 법안 발의 수를 평가 기준으로 삼는 잣대부터 고쳐야 한다는 데에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를 냈다. 아울러 자구수정법안 등이 쏟아지는 걸 막기 위해 국회의 입법지원조직을 정비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이재묵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실행위원은 “자구수정 등은 정례적으로 의장단이나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사무처 법제실의 검토를 거쳐 법안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의원발의 법안은 보다 중요한 의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의원안 발의 전엔 이미 제출돼 있는 관련 법안을 참고하도록 의무화해 동일내용의 입법 발의를 자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근본적으로는 입법기관으로서의 국회 역할에 대한 고민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전진영 국회입법조사처 연구관은 “‘무엇이 일을 열심히 하는 국회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며 “영국은 5년 임기 동안 재·개정되는 법안이 100여건 남짓이나 이를 근거로 영국 의회가 일하지 않는다고 비판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국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바람직한 국회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먼저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는 원혜영 민주당, 김세연 한국당, 이학재 바른미래당, 장병완 평화당,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공동주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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