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주문 들어오면 겁부터"…`노쇼` 테러에 자영업자 울상

예약 후 잠적해도 '고의성' 입증 난항
자영업자 노쇼 분쟁 구제 어려워
전문가 "예약금·선지급 당연시하는 문화 정착해야"
  • 등록 2024-11-28 오후 4:15:32

    수정 2024-11-28 오후 6:58:03

[이데일리 박동현 기자] “한번 당하고 나니까 이젠 대량으로 예약 주문 들어와도 반갑지가 않아요.”

부산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임모(41)씨는 요즘 대량 주문 문의가 오면 우선 한 차례 의심부터 한다고 말했다. 수능이 끝난 다음 날 한 대형학원에서 고3 축하파티를 위해 케이크 10개를 주문했고 정성껏 준비했는데 알고보니 해당 학원 원장 이름으로 장난 전화를 한 것이어서 손해를 봤기 때문이다. 임씨는 “전날부터 문구까지 써가며 정성 들여 준비했는데 막상 당일에 연락이 없어 당황했다”며 “반갑던 예약 주문을 지금은 의심부터 하게 됐다”고 착잡한 마음을 전했다.

최근 대규모 음식을 예약 주문한 뒤 나타나지 않는 이른바 ‘노쇼(예약 부도)’가 연달아 일어나며 자영업자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피해 사례가 끝없이 이어지지만 이를 보완한 제도나 문화가 뒷받침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노쇼 행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더불어 소비자와 점주 양측에게 예약금 제도가 문화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지난 16일 인천의 한 식당이 군부대 사칭 주문으로 음식 50인분을 준비했으나 찾으러 오지 않아 남겨진 음식.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노쇼’ 하려 ‘공문서’까지 사칭…“고의성 없으면 처벌 힘들어”

자영업자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업종을 불문하고 노쇼에 피해를 입은 사연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22일 파주의 한 자영업자는 “자신을 인근 부대 중위라고 소개한 주문자가 회 60인분 총 91만 원 치를 주문해놓고 당일에 잠적했다”는 사연을 털어놨다. 공공기관 사칭뿐만 아니라 공문서를 위조하는 등 수법도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16일에는 위조된 군부대 공문서까지 보여주며 50인분의 불고기를 포장 주문하고 당일에 찾아오지 않았다는 인천의 한 요식업자 사연이 올라왔다.

이러한 노쇼 행위는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가 성립돼 5년 이하 징역 등의 실형에 처할 수 있다. 다만 법조계에 따르면 공문서를 위조한 사례처럼 가해자의 명확한 ‘고의성’이 드러나야 처벌이 가능하다. 의도적으로 했더라도 실수라고 둘러대면 처벌이 어렵다는 설명이다. 수사를 전담하는 한 경찰 관계자는 “만약 노쇼에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실수였다고 일관 되게 주장하고 고의성을 입증할 자료가 없다면 처벌 근거가 부족한 건 사실”이라고 전했다.

노쇼 가해자에 대해 민사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기에도 자영업자에겐 부담이 큰 게 현실이다. 피해 금액이 소송을 걸기에는 애매한 액수라 업자들은 손해를 봐도 대부분 감내하고 있었다. 케이크 노쇼로 피해를 본 임씨 역시 “28만 원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지만 배상을 위해 소송까지 가기엔 부담이 크다”며 “만약 노쇼 당사자가 잡혀도 민사소송까지 할 계획은 없다”고 전했다.

노쇼 당해도 구제 無…“예약금·선지급 문화 정착해야”

법적 분쟁으로 넘어가더라도 자영업자가 구제받기에는 쉽지 않다. 2022년 한국소비자원의 발표에 따르면 2019년부터 3년간 노쇼 관련으로 일어난 281건의 분쟁 중 자영업자가 구제받은 경우는 한 차례도 없었다. 반면 가게가 부과한 예약 보증금이 과도했다는 이유로 소비자가 환급을 받아 간 경우는 30%에 달했다. 예약 부도가 업무방해 행위라는 해석보다는 업주와 소비자 간의 약속이라고 보는 인식이 크기 때문이다.

가게에서는 예약 보증금을 받는 게 노쇼 피해를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이마저도 ‘고객 눈치’에 밀려 대부분 포기하고 있었다. 서울 관악구에서 20년째 요식업을 운영 중인 구모(63)씨는 “사장들 사이에선 이미 (노쇼가) 비일비재한 일이라 예약금 얘기가 오간 지 오래됐다”면서도 “예약금 얘기를 하면 보통 손님들이 안 좋아하고 손님한테 한번 밉보이면 리뷰 테러 등으로 보복당하니 쉽게 말도 못 꺼낸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영업자 커뮤니티에서도 “선지급 해달라고 하면 짜증부터 내서 말도 못 꺼내겠다” “소액은 그냥 눈물을 머금고 눈감는다” 등의 하소연이 올라왔다.

전문가들은 노쇼 행위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해 예약금 제도가 문화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경옥 성신여대 소비자생활문화산업학과 교수는 “외국에선 양이 많은 주문의 경우는 웬만해선 신용카드를 등록하거나 사전결제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며 “호텔 입장 시 신용카드를 맡기듯이 우리도 보증하는 문화가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소비자도 책임 의식을 갖고 예약금과 선지급을 당연시할 필요가 있다”며 “손해 금액의 10배를 물리는 등 노쇼에 대해선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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