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가 미쳤다"…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악몽 찾아오나

유가 배럴당 80달러 돌파…200달러 전망도
기업비용 오르고 가계소비는 줄어드는
에너지 대란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 커져
"아직 미국 실업률 비교적 낮아" 낙관론도
  • 등록 2021-10-12 오후 4:52:39

    수정 2021-10-12 오후 9:08:35

[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1970년대, ‘택시 드라이버’ 같은 불쾌한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영화, 펑크 록 같은 공격적인 음악이 인기를 얻은 건 우연이 아니다.” 미국 경제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70년대 미국에 닥친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거친 대중문화라는 형태로 반영됐다고 평가했다.

때아닌 70년대 대중문화가 언급된 건 또다시 미국이 높은 실업률과 치솟는 물가로 고통받을 우려가 높아지면서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1970년대 미국에 닥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유령이 미국을 괴롭히고 있다”고 전했다.

배럴당 80달러 넘은 국제유가…200달러 전망도

전 세계적인 에너지 대란이 유가발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있다. 11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에서 11월물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전장보다 1.17달러 오른 배럴당 80.52달러로 마감했다. 지난해 40달러 수준이던 국제유가는 매주 최고치를 경신하다 7년 만에 종가 기준 80달러 선도 넘은 것이다.

유가의 고공행진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전망이 나온다. 골드만삭스는 연말까지 유가가 배럴당 90달러에서 100달러 선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글로벌 에너지 위기가 유가를 배럴당 200달러 이상으로 끌어올릴 것으로 내다봤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주요 산유국에 이례적으로 증산을 요청했지만, 산유국들은 시큰둥한 상황이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70달러 선을 넘기자 미국은 유가 안정을 위해 석유수출국기구(OPEC)과 러시아 등 비(非)OPEC 산유국들의 협의체인 OPEC+에 공급을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OPEC+는 11월에도 기존 증산 속도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고유가로 인한 호황을 누리겠다는 심산이다.

불가리아에서 터키로 천연가스를 수송하는 파이프라인(사진=AFP)
일각에서는 OPEC+가 공급을 늘리고 싶어도 못 늘리는 상황이라는 시각도 있다. 전 세계적으로 탈탄소 기조가 확산하는 만큼 석유와 천연가스 산업 전반에 걸쳐 투자가 줄어들었고, 원유 생산량을 늘리더라도 늘어난 공급량을 저장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 증산하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원유뿐만 아니라 천연가스 등 각종 상품들이 일제히 오르면서 기업 생산비용 증가와 가계 소비 여력 감소를 부추기고 있다. 올해 내내 구리와 팔라듐, 철광석, 목재, 우라늄까지 원자재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하며 연일 최고치를 찍고 있다. 유럽에서는 올 들어서만 천연가스 가격이 4배 올랐으며, 지난 1년간 8배 넘게 뛰었다. 이는 기업의 제조 및 운송비용 증가로 이어지며 결국 가격 인상 요인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 과정에서 가계의 가처분소득은 줄고 소비가 침체해 결국 성장률을 끌어내릴 가능성이 커진다. 1970년대처럼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실업률도 덩달아 높아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다.

‘닥터 둠’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글로벌 스태그플레이션을 경고했다(사진=AFP)
에너지발 인플레, 스태그플레이션 우려 키워

이미 월가 내에서는 딴 세상 얘기로 여겨졌던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에 대한 분석에 한창이다. 팩트셋에 따르면 3분기 어닝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기업들이 보고서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을 언급한 횟수가 글로벌 금융위기인 2008년 이후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월가의 대표적 비관론자 ‘닥터 둠’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도 스태그플레이션을 경고했다. 루비니 교수는 올 3분기 미국과 유럽, 중국의 성장세가 예상보다 나빠졌고 인플레도 전망치를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짚으면서 “우리는 이미 가벼운 스태그플레이션 상태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루비니 교수는 “세계 경제가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에서 점차 회복하면서 화석연료 수요는 늘어나는데, 재생에너지 공급은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며 유가 상승이 전세계적 인플레를 일으켜 성장 둔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인플레는 일시적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던 중앙은행들도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는 모양새다. 미 연방준비제도를 포함한 각국 중앙은행들이 물가 통제에 실패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면서다.

다만 희망적인 전망도 있다. 시장에선 올해와 내년 전 세계 경제가 지난 몇 년 동안보다도 더 나은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희망론자들은 선진국 실업률이 비교적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근거로 들고 있다. 실제 지난 9월 미국 실업률은 4.8%로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5%를 밑돌았는데, 통상 ‘완전 고용’ 상태는 실업률 4% 이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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