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동욱 기자] 정부가 시중은행을 앞세워 새로운 기업 구조조정 모델을 만들겠다며 추진한 기업 구조조정 전문회사 설립 계획이 결국 무산됐다. 구조조정 전문회사 설립준비위원회는 최근 타당성 결과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된 만큼 신설 회사 계획은 취소하고 부실채권(NPL) 투자회사인 유암코에 관련 기능을 이전하는 내용의 새로운 안을 만들어 정부에 건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애초 11월 출범을 목표로 회사 설립을 추진한 상황에서 설립준비위원회가 갑자기 이전 방침을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안을 낸 것이다. 신설 회사로는 당장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본 정부가 시중은행들에 압력을 행사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구조조정 전문회사 설립준비위원회는 17일 준비위원회에 소속된 각 은행 부행장들을 소집해 회사 신설 계획을 취소하는 대신 유암코 기능을 확대하는 내용의 새로운 방안을 논의한다. 준비위원회는 17일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의견이 하나로 모이면 금융위에 이를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매각을 진행 중인 유암코는 국내 최대 부실채권 투자회사다. 회사를 새로 세우면 시간이 오래 걸릴 뿐더라 당장 성과도 내기 어려운 만큼 이전에 비슷한 기능을 수행한 유암코에 기업 구조조정 업무를 맡기자는 게 새 방안의 중심내용이다. 사실상 애초 추진했던 구조조정 전문회사 설립은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최근 일부 은행이 정부에 이런 건의를 했다”며 “당장 어떻게 할 순 없지만 은행들의 의견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부에선 사실상 정부가 구조조정 전문회사 설립 무산을 유도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 구조조정 전문회사 내부 실무진들도 준비위원회에서 회사 설립 무산을 담은 새로운 방안이 논의된 사실을 이날 처음 전해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은행들은 이날 은행 간 대출약정을 맺을 예정이었지만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모두 중단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들이 구조조정 전문회사에 돈을 대는 걸 꺼리는 분위기는 있었지만 이미 설립하기로 확정된 사안인 만큼 이날 대출약정 계약서를 작성할 계획이었다”며 “그런데 갑자기 설립을 중단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내부에서도 다들 당황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회사를 새로 설립해 일을 진행하면 아무래도 성과를 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이를 우려한 정부가 설립준비위원회에 입김을 넣은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구조조정 전문회사가 수행해야 할 업무를 유암코로 넘기면 애초 정부가 내세운 정책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 구조조정 전문회사는 정부가 채권은행 중심의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나타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고육책이다. 특히 정부는 그동안 구조조정 전문회사가 부실기업에 대한 채권은행의 대출채권을 모두 사들여 경영권을 확보한 뒤 직접 구조조정에 나서기 때문에 구조조정 작업이 더욱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해왔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자본력이 떨어지는 유암코 수준으로는 중견기업 1~2곳 정도만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사실상 보여주기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