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땅콩회항' 주인공 구속 100일 뒤돌아보면

'마녀사냥'식 집단분노, 사회 부조리만 공고해져
"성찰 가능한 사회토양 필요하다"
  • 등록 2015-04-08 오후 5:54:14

    수정 2015-04-08 오후 7:25:40

[이데일리 정태선 기자] “우리나라는 헌법 위에 정서법, 그리고 정서법 위에 ‘떼법’이 판치는 나라가 됐다.” 집단분노를 등에 업고 떠들썩하게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섰다가 뚜렷한 결론 없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사건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이제는 엄정해야 할 법집행에까지 집단적인 감정 배설이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위험수위에 다 달랐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이태임, 태진아, 클라라 등 이미지에 더해 소문이나 가십까지도 소비의 대상이 되는 연예인뿐 아니라 이제는 경제나 정치적인 이슈까지도 실체적 진실이나 본질과 상관없이 여론이나 국민정서라는 이름으로 감정소비, 화풀이 대상이 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현상은 강자가 약자에게 부적절한 방식으로 권위를 세우는 ‘갑의 횡포’라는 프레임을 형성하면 메가톤급 후폭풍을 만든다. 몇 달 전 국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인천 송도 어린이집 폭행사건은 어른이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어린아이를 학대했다는 점에서 갑질이었고, 대기업 상무가 기내식 라면을 트집 잡아 승무원에게 행패를 부린 ‘라면상무’사건, 대리점주에게 폭언과 물량 밀어내기 등을 강제한 남양유업 사태, 아르바이트 주차요원을 무릎 꿇린 ‘백화점 VIP 모녀’ 사건에 이르기까지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례를 만들어가고 있다.

특히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의 경우 사회적 파장은 엄청났다. 외국 언론까지 ‘땅콩 회항’사건과 함께 유행어 ‘갑질(gabjil)’을 소개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이달초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조현아 전 부사장은 사건 이전의 위풍당당한 ‘갑’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100일 가까운 옥살이로 부쩍 수척해지고 정신적으로 피폐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변호인은 피해자들과의 합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뼈저리게 뉘우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조 전 부사장이 구치소로 향할 때 많은 이들이 후련하게 생각했지만 과연 구속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적지 않았다. 조 전 부사장은 개인의 사생활이나 신상정보는 물론 네티즌의 비난은 여과 없이 확산되고 예능프로에서까지 패러디할 정도로 조롱의 대상이 됐다. 이렇게 ‘마녀사냥’식으로 분출한 집단분노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때가 됐다. 응축된 분노를 통해 우리사회 불공정한 관행이나 개선되지 않은 구태와 악습, 상류층의 특권의식이나 일탈 등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줄 수는 있다. 집단분노는 때론 강자의 횡포나 부조리에 맞서는 대중의 힘을 보여주고, 사회를 변혁하는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단분노가 특정 개인에게 쏠리면 사건의 구조와 본질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당사자만 군중의 화풀이 대상이 될 뿐 정의나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목청 큰 사람이 이기는 곳, 집단분노만 쏟아내는 사회에서는 부조리한 구조만 더 공고해 질 뿐이다. 주체가 불분명한 집단분노에 떼가 낀 세력이나 의도가 개입하면서 그 순수성은 사라지고 사회분열이나 갈등만 조장해 왔다. 재벌 3세 ‘땅콩회항 사건’의 주인공이 구속된 지 8일이면 꼭 100일이다. 그가 우리 사회에 던져준 메시지 중에는 분노의 강을 넘어 이성적인 토론과 구조적인 성찰이 가능한 사회를 곱씹어 보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포함된다. 향후 진행되는 항소심 재판이 그래서 더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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