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물가 인상 여파에 분위기가 꺾인 인수합병(M&A) 시장이 최근 들어 반등 조짐을 보이고 있다. 어수선한 국내외 상황에 밸류에이션(기업가치) 하락과 자금난에 직면한 매물들이 쌓이는 상황이 연말 반등론의 근거로 꼽힌다. 시장에 낀 M&A 거품이 빠지면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인수에 나설 환경이 조성됐다는 것이다.
대형 블라인드펀드(투자 대상을 정하지 않고 목표수익률만 제시한 뒤 투자금을 모으는 펀드)를 조성하며 드라이파우더(펀드 내 미소진 금액)가 넉넉한 경영참여형 사모펀드(PEF) 운용사나 곳간 단속으로 넉넉한 자금을 보유한 대기업 계열 전략적 투자자(SI)들이 연말 M&A 시장 큰 손으로 군림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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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하던 M&A 시장에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대우조선해양(042660)(대조양)을 인수한 한화그룹이다. 산업은행은 지난 26일 대조양과 한화그룹이 2조원 규모 조건부 투자합의서(MOU) 체결했다고 밝혔다. MOU 체결에 따라 한화그룹은 2조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시행해 대조양 지분 49.3%와 경영권을 확보하게 된다.
산업은행은 MOU 체결 이후 한화그룹보다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투자자 참여 기회를 위해 ‘스토킹 호스’(인수 예정자를 정해놓고 공개 입찰을 벌이는 것) 절차를 밟기로 했다. 스토킹 호스는 주로 회생기업을 매각할 때 거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지난해 이스타항공과 올해 쌍용차(003620) 인수전에도 이 방식이 사용됐다. 인수예정자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보니 인수예정자 지위에 오른 원매자가 여러모로 유리한 구조다.
한화그룹의 대조양 인수가 하반기 M&A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마땅한 새 주인을 찾지 못해 표류하던 대조양을 인수하며 깜짝 빅딜의 주인공이 됐기 때문이다. 잠잠하던 M&A 시장 촉매제로 작용할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눈길을 끄는 것은 가격 측면에서도 한화그룹이 실리적 명분을 챙겼다는 점이다. 한화그룹는 지난 2008년에도 대조양 인수를 시도했다. 당시 매각 우선협상자로 선정되며 인수보증금 3150억원을 내고 양해각서까지 체결했다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계약이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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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가 쏘아 올린 시장 열기는 여기저기로 퍼져 나가는 모습이다. 밸류에이션(기업가치)이 출렁이며 매각 작업이 장기화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던 일진머티리얼즈(020150)는 롯데케미칼이 유력 인수자로 떠오르며 막판 협상을 진행 중이다.
거래 대상은 허재명 사장이 보유한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53.3%다. 매각전 초반에는 4조원대 매각가가 점쳐지기도 했지만, 현재 업계 안팎에서는 2조원대 중반에 가격이 형성될 것으로 점치고 있다.
롯데그룹은 이전부터 전기차 소재 투자에 꾸준한 관심을 보여왔다. 롯데정밀화학이 2020년 두산솔루스(현 솔루스첨단소재(336370)) 경영권을 인수한 PEF 운용사인 스카이레이크에 2900억원을 투자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에도 솔로스첨단소재의 전기차 핵심 소재 사업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고 투자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2차 전지 핵심 소재인 ‘동박’을 주력으로 생산하는 일진머티리얼즈 인수를 타진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평가다.
사모펀드 큰 손인 MBK파트너스(MBK)의 행보도 눈길을 끈다. MBK는 글로벌 투자자들과 함께 SK온 프리IPO(상장 전 투자유치)에 참여하는 1조5000억원 규모의 펀드 조성을 검토 중으로 알려졌다. MBK가 지난해 11월 조성한 2조4000억원 규모의 ‘스페셜시추에이션’(특수상황·SS)펀드 자금을 사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MBK도 SK온이 제시한 수익률 게런티 등 최고대우(MFN) 조항을 보장받고 투자를 검토 중으로 전해진다. 이 사안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SK온 밸류에이션 조정에다 IPO 기간도 당겨진 만큼 MBK도 한투PE의 조건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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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현재 M&A 시장에 나와 있는 조 단위 매물(경영권 인수·지분투자 포함)은 총 9곳에 이른다. 예년과 비교해 대형 매물 출현이 겹친 상황에서 매각 측으로서는 열기 조성을 반길 수밖에 없다.
대형 매물뿐 아니라 자금난에 직면한 스타트업이나 중견 기업들도 시장에 쏟아지고 있다. 투자유치가 여의치 않은 기업 입장에서는 낮은 밸류에이션에 지분 매각이나 경영권 매각에 나설 수 밖에 없다. 이 밖에도 상장 직전 단계에서 자금난에 빠진 기업들의 경우 현 시점에 지분을 확보하고 분위기를 보며 밸류업(기업가치 상향)을 타진할 가능성도 힘을 얻고 있다.
한 자본시장 관계자는 “시장 분위기가 주춤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자금력 있는 투자자들은 현 시점에서 기회를 보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낮은 밸류에이션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고 보는 분위기다 보니 예상치 못한 깜짝 딜이 연내 또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