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기업(동해제강)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3년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YS(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 정치를 시작했다. 1993년 김영삼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내무부 차관 등 요직을 거친 그는 1996년 15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한 이후 19대까지 5선을 지냈다. 하지만 5선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김 신임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당 대표시절이던 2005년 자신에게 사무총장을 제의한 것을 계기로 인연을 맺었고, 이후 2007년 대선후보 경선때 박근혜후보 캠프의 실질적 ‘좌장’으로 경선과정을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친박(친박근혜계) 좌장’이라는 타이틀은 이듬해 이명박정부 첫해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곧바로 시련으로 다가왔다. 당시 친이(친이명박계) 주도로 이뤄진 공천에서 친박계가 대거 공천 탈락하자 김 대표는 ‘친박무소속연대’를 결성, 자신을 포함 12명의 국회의원이 당선됐다.
이후 한나라당에 복당, 원내대표까지 역임했다. 그러나 이명박정부의 당 ‘원내대표’ 라는 직함은 김 대표와 박 대통령과의 사이를 벌린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박 대통령은 당시 친이계가 그에게 원내대표직을 제안한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고 ‘친박에 좌장은 없다’는 말로 그와의 관계를 재설정했다. 원내대표가 된 이후에도 세종시 논란을 두고 또 한번 박 대통령과 충돌하며 정치적으로 ‘탈박’(탈박근혜계)으로 분류됐고, 이는 2012년 19대 총선 공천 탈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4년 전과 달리 무소속 출마를 하지않고 ‘백의종군’을 선언하며 대규모 탈당 사태를 막았고, 그해 대선에서 선거대책총괄본부장을 맡아 야전침대에서 숙식을 하며 선거전을 지휘했다.
이제 국가의전서열 7위이자 집권여당 대표라는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 그의 앞에 놓인 첫 번째 과제는 7·30 재보궐선거다. 역대 최대규모로 치러지는 이번 재보선의 성적표는 곧바로 당 대표 임기 초반 리더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재보선 이후에는 ‘당·청관계의 재정립’ ‘야당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실질적 시험대에 놓인다. 동시에 당권 경쟁과정에서 발생한 과열 후유증을 잠재우기 위한 통합의 리더십도 필요하다. 김 신임 대표가 임기 2년을 채운다면, 2016년 치러질 20대 총선까지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은 물론 명실상부한 차기 대권 주자 중 한명으로 발돋움하게 될 전망이다.
<김무성 신임 대표 프로필>
△경북 포항 출생(62) △중동고 △한양대 경영학과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내무부차관 △15, 16, 17, 18, 19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원내수석부총무 △국회 재정경제위원장 △민주화추진협의회장 △한나라당 사무총장 △한나라당 최고위원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한나라당 원내대표 △18대 대선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총괄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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