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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질 사태까지 지지율 곤두박질
그는 조지아 주지사를 거쳐 1976년 현직인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을 제치고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재임 중 대표적인 업적으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꼽힌다. 그는 1978년 9월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당시 이스라엘 총리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해 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수십년간 이어져 온 중동 갈등을 막고 중동 평화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당시 미국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성장 둔화와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여기에 1979년 11월 이란 이슬람 혁명 후 강경파 대학생들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장악하고 52명의 미국인들을 인질로 잡는 사태가 벌어졌다. 상황은 444일간 이어졌고, 미흡한 대응으로 지지율은 고꾸라졌다. 결국 그는 재선에 도전했으나 공화당 소속 로널드 레이건에게 압도적인 표차로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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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뉴욕타임스(NYT)는 “카터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경멸에서 존경으로 그의 대통령 퇴임 이후 발전했다”고 평했다. 재임 시절 인권을 거듭 강조했던 그는 1982년 평화 정착 및 인도주의적 임무를 위한 카터재단을 설립했다. ‘작은 유엔’처럼 운영되는 카터재단은 교육, 농업 개발 및 보건 분야 프로그램을 후원하고 세계 각국 공정한 선거를 지원한다. 그는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을 짓는 비영리 단체인 해비타트 사랑의 집 짓기 운동도 수십년 동안 진행했다.
이외에도 카터 전 대통령은 아이티, 보스니아 등 국제 분쟁 지역에서 그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4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이후 1차 북핵 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진행된 방북이 대표적이다. 그는 김일성 북한 주석과 회담하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 정상회담을 주선했다. 그해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카터 전 대통령을 매개로 하는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으나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후에도 그는 미국인 억류 사안이 있었던 2010년 8월, 세계 평화 정착과 인권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전직 지도자들의 모임인 ‘디 엘더스’ 소속 전직 정상들과 함께 2011년 4월 등 총 3차례 북한을 찾았다.
박정희와 충돌, 주한미군 철수 추진도
1977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단계적으로 주한미군을 철군시킨다는 세부 계획도 제시했다. 지난 2018년 공개된 미 외교 기밀문서에 따르면 1979년 6월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선 양국 정상이 주한 미군 문제를 두고 정면충돌했다.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은 “우리의 가장 강력하고 소중한 동맹 가운데 하나이자 지구상에서 가장 훌륭한 국가 중 한 곳인 한국이 인권 문제 때문에 미국에서 비판을 받는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목소리 냈고, 박 대통령은 사실상 내정간섭이라며 불만을 표출했다.
이후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이른바 ‘암스트롱 보고서’ 이후 달라진 여론으로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 감축 계획은 보류됐다.
카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국가가 주관하는 국장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워싱턴 DC와 조지아 애틀랜타에서 공개 장례 행사 등 국장이 8일간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NYT가 보도했다. 카터 전 대통령이 생전 추도사를 부탁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추도사를 할 예정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통해 2025년 1월 9일을 국가적 애도일로 지정한다고 밝히면서 “카터 전 대통령은 인품, 용기, 연민을 가진 인물이며, 평생 봉사를 통해 미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정의됐다”고 치켜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