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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은 한국이 낳은 전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1932~2006)이 탄생한 지 9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백남준은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공부하고 이후 독일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했다.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가 예술가로 활동했다. 2006년 백남준은 한국에서 저 멀리 떨어진 미국 마이애미에서 뇌졸중 투병생활 중에 끝내 생을 마감했다. 올해는 백남준이 우리 곁을 떠난 지 16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미디어아트의 첫 출발지로 비디오아트를 보고 있다. 그중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비디오아트의 사전적 의미는 텔레비전 화면, 비디오 영상을 이용하는 예술이다. 백남준은 1960년대부터 비디오아트를 시작했다. 그렇기에 미디어아트를 말하려면 백남준이라는 인물을 탐구해 봐야 한다. 백남준의 삶과 예술세계를 통해 미디어아트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어보자.
◇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일본을 떠나 독일로
백남준은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의 백남준은 신재덕, 이건우 등에 사사 받으며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1947년 경기고 전신인 경기공립중학교 시절에 접하게 된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그의 작품에 흥미를 느끼며 새로운 음악에 대한 열정에 눈을 뜬다. 1949년 한국전쟁이 임박하자 백남준은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하고, 1년 뒤에는 다시 도쿄로 이주했다. 백남준은 도쿄대에 입학해 음악과 미술을 공부했다. 졸업논문으로 ‘아놀드 쇤베르크 연구’를 제출한다. 이후 1956년 서양의 고전주의 및 모더니즘 음악을 공부하고자 독일로 유학을 떠난 백남준은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작곡가 볼프강 포트너에게 사사 받으며 음악 공부를 이어갔다. 그 이듬해 백남준은 미국의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났다. 원래 클래식 작곡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던 백남준은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이었던 존 케이지와의 만남으로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동양의 선(禪) 사상에 기반을 둔 케이지의 영향으로 서구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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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이지에 대해 논하기 전에 먼저 플럭서스에 대해 알아보자. 플럭서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아방가르드 예술 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국제적인 전위예술(기존의 예술에 대한 인식과 가치를 부정하는 움직임) 운동으로 꼽힌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독일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플럭서스는 반예술 운동이었으며, 특히 미술관과 수집가의 독점적인 소유물이 되는 예술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플럭서스는 ‘변화’, ‘움직임’, ‘흐름’을 뜻하는 라틴어인 플룩스(Flux)에서 유래한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미국인 조지 마키우나스가 1962년 독일 헤센주의 비스바덴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플럭서스-국제 신음악 페스티벌'의 초청장 문구에서 처음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플럭서스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경계를 허물고 협업했다. 실험적이고 그 자체로 큰 인상을 남긴 새로운 방식을 통해서 기존 예술이 가지고 있던 개념이나 범위를 크게 확장했다. 조지 마키우나스, 오노 요코 등과 함께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이 이 운동을 주도한 핵심 멤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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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럭서스의 일원으로 기존 예술을 부정하고 새로운 예술을 만들고자 했던 백남준에게 새로운 매체가 다가온다. 바로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은 ‘멀리, 원격의’의 뜻을 가진 접두사 ‘tele’와 ‘시선, 시야’의 의미를 지닌 ‘vision’으로 만들어진 단어다. 19세기 말에 니프코브 원판과 브라운관이 개발되어 텔레비전의 출현을 예고했다. 1925년 영국의 베어드는 ‘텔레바이저’라는 기계식 텔레비전을 선보였다. 이후 텔레비전 사업은 194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성장했다. 한국에서 텔레비전이 일반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건 1954년 7월 30일이다. 1960년대 미국의 일반 가정의 텔레비전 보급률은 90%에 달한다.
백남준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텔레비전을 작업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단지 메시지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예술의 도구로 삼는 영상작업을 시도했다. 백남준은 1963년 3월 11일부터 3월 20일까지 독일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열린 자신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 13대의 텔레비전을 등장시켰다. 텔레비전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조해서 새로운 전자 이미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비디오아트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두 달 뒤 미국의 스몰린 갤러리에서 볼프 포스텔이 텔레비전과 카메라를 활용한 전시를 선보였다. 백남준과 볼프 포스텔은 비디오아트의 시작을 알린 1세대로 기록된다.
백남준의 부퍼탈 전시는 텔레비전의 전자적 물질성을 활용한 영상처리 기술이 관객의 참여를 거쳐 미적 의의를 획득한 최초의 전시 현장이었다. 비디오아트의 미학적인 의미는 시각예술에서 물질 개념을 떠난 빛과 음극선에 의한 전자 이미지를 구현한 것에 있다. 또한, 시간에 의한 이야기 서술이라고 하는 이질적인 개념을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백남준은 소니 포타팩 비디오 카메라를 작업에 활용해 비디오 설치 및 비디오 퍼포먼스와 함께 비디오 조각 작품들도 선보였다. 그의 비디오 조각들로는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 ‘첼로와 비디오테이프를 위한 콘체르토’(1971), ‘TV 부처’(1974) 등이 있다. 백남준의 작품은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게 가능하다. 'TV 붓다'는 불상과 텔레비전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 안에는 마주 보는 불상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는 방식이다. 관람객이 이 불상 뒤에 서 있으면, 화면 안에 그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단순히 관람객을 화면에 등장시키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관람객들이 화면 속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아를 찾음과 동시에 당시 첨단 기술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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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탄생 90주년을 맞은 백남준을 기념하는 전시가 줄지어 열린다.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는 애칭이 붙은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으로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 ‘완벽한 최후의 1초 - 교향곡 2번’ ‘'바로크 백남준’ 등의 전시를 열었다. 영국의 테이트모던 미술관으로부터 ‘시스티나 성당’(1993)을 사들인 울산시립미술관은 ‘21세기 천지창조 시스틴 채플’ ‘땅의 아바타, 거북’ 등의 전시를 개최했다. 포천문화재단과 백남준문화재단의 협력으로 ‘멀리 보다: 백남준의 TV’가 포천반월아트홀에서 열렸다. 그 외에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기술적 문제로 폐쇄했던 ‘다다익선’(1987)을 올해 9월 재가동했다. 대전시립미술관도 10월 개관하는 기획전에서 1993년 대전엑스포 개최를 기념해 엑스포 재생조형관에 설치했던 ‘프랙탈 거북선’(1993)의 원형을 복원해 선보인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미국 아트페어인 아모리 쇼에 ‘리처드 머트’라는 가명으로 남성용 소변기를 뒤집어 ‘샘’ 작품을 출품했다. 마르셀 뒤샹의 발상 전환은 현대미술의 시작이기도 하다. 백남준은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마르셀 뒤샹은 비디오를 제외한 모든 것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는 커다란 입구와 아주 작은 출구를 만들어 놓았지요. 후자가 비디오입니다. 그곳으로 나가면 우리는 마르셀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셈입니다.”
마르셀 뒤샹이 열어놓은 현대미술의 출구로 많은 예술가가 드나들었지만, 뒤샹이 열어놓은 현대미술의 영향력을 뛰어넘는 이들은 적었다. 작은 출구로 나가지 못하고 대부분 그 안에 갇혔다. 뒤샹이 전파한 현대미술의 테두리 안에서 예술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남준은 이와는 다르게 자신이 비디오아트를 창시해 작은 출구로 나갔다는 말이다. 오늘날 백남준이 잉태한 비디오아트는 미디어아트의 기반이 되었고, 예술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우리는 백남준이 남긴 작품을 통해 그의 정신과 여전히 마주할 수 있다.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이 흘렀지만, 작품을 통해 백남준은 계속 살아있다.
프랑스 파리 고등미술연구원 예술경영학과에서 수학했고, 파리 고등실천연구원에서 서양예술사학과 고고학으로 석사 학위, 파리 고등사회과학연구원에서 미학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상아트(주) 대표이사이자 유럽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미술계 현장에서 활발한 활동과 함께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성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