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동양피해자의 울먹임과 의원님의 'A4용지'

  • 등록 2013-11-04 오후 4:03:48

    수정 2013-11-04 오후 6:24:11

[이데일리 나원식 기자]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 유권자들을 만날 때 항상 손에 수첩을 들고 있었다. “잘살게 좀 해달라”며 외치는 유권자의 목소리를 수첩에 담기 위해서다. 당초 그의 ‘수첩공주’라는 별명은 ‘수첩에 적은 말만 되풀이한다’는 비아냥의 대상이었지만, 새누리당은 이를 오히려 홍보 수단으로 활용했다. “국민의 소리를 수첩에 직접 적기 위해” 손에서 놓지 않는 수첩이 ‘신뢰와 약속’의 상징이라는 설명이었다.

4일 금융감독원에서 열린 새누리당 국회의원들과 동양피해자의 면담에서 등장한 ‘A4용지’는 박 대통령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대비됐다. 면담은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이 이날 오전 급작스럽게 금감원에 통보해 마련됐다. 약속보다 10분 늦게 도착한 의원들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금감원 직원들이 급조해서 마련해준 A4용지에 동양피해자들의 울먹임을 받아 적어 내려갔다.

피해자들의 요구를 새겨듣고 대책을 잘 세워주면 됐지, 수단(A4용지)이 뭐가 중요하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A4용지는 ‘준비 안 된’ 이날 면담의 일면에 불과하다. 오전11시15분에 시작된 면담은 11시59분에 끝났다. 동양 피해자들은 할 말이 아직 많은 듯 했지만, 의원들은 점심시간인 12시가 되기 전에 끝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짧은 시간 동안 준비한 말들을 쏟아낸 피해자들은 목이 마른 듯 마른 침을 삼켰다. 그때서야 김정훈 정무위원장은 금감원에 “물이라도 한 잔 씩 드리지 그랬냐”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다. 피해자들은 이날 면담 장소를 두고 불만을 토로했다. 면담을 하자고 해놓고 어수선한 민원센터에 대충 자리를 만들어 취재진을 부른 것은 ‘언론 홍보용’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한 피해자는 “우리를 구경거리로 만들어 놨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면담은 동양 사태를 대하는 당국과 국회의 안일한 대응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자리였다. 특히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책임추궁’에만 집중하는 모습은 아쉬운 대목이다. 책임자를 문책하는 작업과 동시에 제2의 저축은행 사태나 제2의 동양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금융당국과 정치권이 고심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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