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경영복귀 1년`..삼성 어떻게 달라졌나

  • 등록 2011-03-23 오후 4:12:03

    수정 2011-03-23 오후 4:12:03

[이데일리 이승형 기자] 20여년전 어느 날 이건희 삼성 회장은 삼성전자 경영진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올해 1800억원 영업이익을 냈습니다. 사상 최고입니다." 그러자 이 회장은 들뜬 목소리의 임원 보고에는 아랑곳없이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했다. "1조원은 언제쯤 가능합니까?" 순간 주위는 조용해졌다.   그로부터 5년이 안돼 1조원의 영업이익은 달성됐다. 하지만 그때에도 어김없이 이 회장은 "이제 10조원 해야지"라며 경영진을 다잡았다.

이 사례는 이 회장이 보여온 경영 행보 가운데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의 사전에 '만족'이란 단어는 없다.

"이 회장의 눈높이는 항상 저 위에 있었습니다. 결코 현실에 안주하는 법이 없지요. 실적 보고를 할 때 아무 말씀이 없거나 '고마 됐네'라고 말씀하시면 그게 최고의 극찬입니다."

30여년을 근거리에서 이 회장을 지켜봤던 한 삼성 계열사 CEO의 말이다. 이 회장 특유의 '위기론'도 이런 성향에서 비롯된다. '눈앞에 1등이 없으면 가상의 1등이라도 만들어 추월하자'는 주의다.

◇ 위기론과 함께 달라진 것들

오는 24일 이 회장은 경영복귀 1년을 맞는다. 2010년 3월 24일 경영 일선에 돌아온 이 회장의 복귀 일성은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였다. 다시 '위기론'이었다.

복귀하기 불과 2개월 전인 1월에 삼성전자는 매출 136조 2900억원, 영업이익 10조 9200억원이라는 2009년도 실적을 발표했었다. 국내 기업 최초로 '100조-10조' 클럽의 문을 여는 동시에 HP와 지멘스 등을 제치고 세계 최대 전자업체로 등극한 것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그런 성과는 마치 잊기라도 한 듯 "지금이 진짜 위기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말은 단순히 삼성 임직원들에게 보내는 경고성 메시지 수준이 아니었다.

그것은 '애플의 출현'과 '토요타 등 일본 기업의 몰락' 등으로 달라진 글로벌 경영 환경의 흐름을 읽은 이 회장이 '삼성호(號)'의 좌표를 완전히 재설정하는 계기로서 작용했다. 그 때문인지 삼성전자는 아이폰이라는 암초를 만났지만 표류하지는 않았다. 갤럭시S라는 '물건'을 탄생시키고 성공시켰다.

"우리 앞에 1등이 있으면 따라잡아서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회장이 복귀하시고 그 특유의 근성이 한층 더 발휘됐다고 봐야겠죠."

최근 삼성 계열사의 한 임원은 그렇게 말했다. 이 회장이 복귀한 이후 실제로 삼성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긴장감이다. 이 회장 스스로도 "나부터 긴장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긴장감은 일의 속도를 높였다. 의사결정이 빨라지고 투자 또한 과감해졌다. 소위 말하는 '오너 효과'를 등에 진 '스피드 경영'이다.

경영 복귀 한 달여 만인 지난해 5월10일 오는 2020년까지 친환경이나 건강증진(헬스케어)과 관련된 신사업 분야에 그룹 차원에서 총 23조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그로부터 1주일 뒤에는 반도체와 LCD 분야 등에 사상 최대 규모인 26조원의 투자 결정을 내렸다.

당시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현 부회장)은 이를 두고 "주인이 있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퍼포먼스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일본 기업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이 회장의 리더십은 일본 재계와 학계에서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와세다대 교수는 '일본의 몰락'이라는 저서에서 "이건희 회장의 경영 리더십이 삼성전자 DNA의 열쇠"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이 회장이 복귀하고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긴장감, 안정감, 자신감 3가지"라고 말했다. 이같은 분위기를 반영하듯 지난해 삼성전자는 매출 150조원 시대를 열었다. 한 해 매출이 154조6천300억원, 영업이익은 17조3천억원의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지난 1월 9일 그는 "옛날에 잘나가던 회사들은 퇴보하는 경향이 있고, 새로 일어나는 회사들이 많았다"며 "한국 기업이 정신 안차리면 한걸음 뒤쳐지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기업 경영 자체가 위기의 연속인 것이다.

◇ 삼성의 미래, 그리고 산적한 과제들

지난해 11월 19일 삼성에서는 조직 개편과 함께 인사 이동이 단행됐다. 그룹 컨트롤타워로 '미래전략실'이 신설되는 한편 이학수 삼성전자 고문, 김인주 상담역 등 과거 전략기획실 임원들에 대한 문책성 인사가 이뤄진 것이다. 이 회장의 '복심(腹心)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삼성의 2인자였던 이학수 고문의 퇴진은 삼성은 물론 재계에서도 '큰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삼성사(史)에 있어 한 시대의 종결을 의미했다. 이 회장은 미래를 위해 과거와의 결별을 선택했다. 재계에서는 이를 놓고 삼성이 비자금 사태 등 과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어던져야 더 큰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젊은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이 회장의 지침도 더해졌다. 이에 맞춰 이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은 사장으로,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는 호텔신라 대표이사 사장 겸 에버랜드 전략담당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차녀인 이서현 제일모직·제일기획 전무는 부사장이 됐다.

이같은 흐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회장은 이미 경영복귀 직후부터 미래전략실 신설과 이 고문 등 과거 인물의 퇴진, 3세 경영인의 전면 등장 등을 구상했으며 이를 시차를 두고 차근차근 실천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의 복귀로 삼성은 미래를 위한 준비작업을 어느 정도 마무리했지만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단기적으로는 애플 등 급성장한 글로벌 기업들과의 경쟁을 극복해야 하고, 길게는 신수종 사업을 제 궤도에 안착시켜야 한다.

지난 8일 이 회장은 "현재 맡은 것을 빨리 정상궤도에 올리고, 뛰고, 제대로 된 물건을 세계시장에 내서 그걸 1등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 자격으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지난해에만 10여차례 해외 출장을 다녀온 이 회장으로서는 오는 7월 드러나게 될 유치 도시 결정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 문제도 이 회장에게는 해결해야 할 중요 과제다.

내년 4월까지 삼성 순환출자 구조의 핵심 기업인 삼성에버랜드의 삼성카드 지분 25.64% 가운데 20% 이상을 처분해야 한다. 삼성카드는 에버랜드 1대 주주로,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대한 법률(금산법) 규정에 따라 지분을 5% 이하로 낮춰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회장과 삼성에게 있어 가장 특별한 숙제는 '사랑받는 국민기업'으로의 변화를 모색하는 데 있다는 것이 재계의 중론이다. 동반성장에서 사회공헌활동에 이르기까지 무엇하나 소홀할 수 없다.

재계 관계자는 "아직까지도 우리 국민들은 삼성 등 우리 대기업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는 데 주저하는 것이 사실"이라며 "삼성이 국가 대표 기업인만큼 얼마나 큰 매출을 내느냐도 관심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들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느냐하는 것은 더 큰 관심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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