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통화로 나체 녹화, 처벌 못한다?…디지털 성범죄 사각지대

영상통화로 나체 촬영 후 SNS 유포, 협박까지
1·2심 "전부 유죄"…대법, 무죄 취지 파기환송
디지털 성범죄 처벌 법적 공백…개정 필요성
  • 등록 2024-12-03 오후 12:00:00

    수정 2024-12-03 오후 12:00:00

[이데일리 성주원 기자] 키르기스스탄 국적의 A씨는 러시아 국적의 전 여자친구 B씨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극단적인 범행을 저질렀다. 지난해 5월 영상통화 중 B씨가 샤워하는 나체 모습을 몰래 촬영한 A씨는 이를 빌미로 B씨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너 사진들 텔레그램에서 돌아다닐 거야”라며 위협했다.

급기야 A씨는 자신의 협박을 실행에 옮겼다. 틱톡과 인스타그램에 B씨의 나체 사진을 올렸고, B씨의 아들에게까지 “네 엄마가 뭐하고 다니는지 아냐”며 사진을 전송했다. A씨의 범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B씨의 주거지에 침입을 시도하고, 차량을 손괴했으며, 법원의 접근금지 명령을 어기고 스토킹을 계속하다 결국 B씨를 폭행하기까지 했다.

이에 A씨는 성폭력범죄처벌법 위반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사진=게티이미지
1심 재판부는 A씨의 모든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4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의 사진을 피해자의 아들에게까지 전송했고, 피해자는 피고인으로 인해 상당한 정신적 고통과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며 엄중 처벌의 이유를 밝혔다. 2심 역시 1심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3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A씨의 불법촬영 혐의에 대해 무죄 취지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수원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3일 밝혔다.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제1항이 규정하는 불법촬영죄는 ‘사람의 신체를 직접 촬영한 행위’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영상통화를 하면서 피해자가 나체로 샤워하는 모습을 휴대전화 녹화기능을 이용해 녹화·저장한 행위는 피해자의 신체 그 자체가 아니라 피고인의 휴대전화에 수신된 신체 이미지 영상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사람의 신체를 촬영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원심판결에는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제1항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으므로, 원심판결 중 피해자 신체 촬영으로 인한 성폭력처벌법 위반(카메라등이용촬영·반포 등) 부분은 파기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다만 파기 부분과 원심이 유죄로 인정한 나머지 부분이 경합범 관계에 있어 하나의 형이 선고됐기 때문에 원심판결이 전부 파기됐다.

실제로 영상통화 도중 그 화면을 촬영 또는 녹화하는 행위를 기소하는 사례는 매우 드문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이렇게 촬영된 영상을 유포할 경우에는 현행법상 처벌이 가능하다.

이번 판결로 디지털 성범죄 처벌의 법적 공백이 드러났다. 현행법은 카메라로 직접 피해자의 신체를 촬영하는 전통적인 불법촬영만을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어, 영상통화나 화상채팅 등 디지털 매체를 이용한 새로운 유형의 성범죄는 처벌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법조계에서는 디지털 성범죄 처벌 규정의 현실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영상통화를 통한 촬영이나 디지털 이미지를 이용한 성범죄 등 새로운 유형의 범죄에 대응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사진= 방인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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