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연호 기자]
[편집자 주] 언어의 특성 중 역사성이라는 것이 있다. 언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 소멸, 변화의 과정을 겪는 것을 가리켜 바로 ‘언어의 역사성’이라고 한다. 언어의 역사성에 기반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신조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매일같이 넘쳐나는 신조어의 세상 속에서 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같은 신조어들이 다양한 정보기술(IT) 매체를 통한 소통에 상대적으로 더욱 자유롭고 친숙한 10~20대들에 의해 주로 만들어지다 보니, 그들과 그 윗세대들 간 언어 단절 현상이 초래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젊은층들은 새로운 언어를 매우 빠른 속도로 만들어 그들만의 전유물로 삼으며 세대 간 의사소통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기성세대들도 상대적으로 더 어린 세대들의 언어를 접하고 익힘으로써 서로 간의 언어 장벽을 없애 결국엔 원활한 의사소통을 꾀하자는 취지에서 연재물 ‘이연호의 신조어 나들이’를 게재한다.
| 사진=tvN 예능 프로그램 ‘놀라운 토요일’ 방송 화면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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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 > 속 희재와 정빈의 대화에서 (_)에 들어갈 가장 적절한 말은?
<희재: 오늘 소개팅 어디서 하기로 했어?
정빈: 합정에서 보기로 했어. 근데 그것보다 큰일이 생겼어. 어젯밤에 먹방 보다가 갑자기 배고파서 라면에 만두까지 먹고 잤더니 얼굴 부었어.
희재: (_)!>
1)스불재 2)소지말박 3)캘박 4)엄근진
정답은 1번 ‘스불재’다. 신조어 스불재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의 준말로, 자신이 벌인 일을 후회하거나 자책할 때 쓰는 말이다. 본인의 의지로 한 행동이지만 능력 부족이나 다른 외부의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인해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주로 쓰는 말이다.
사자성어로는 ‘자기의 줄로 자기 몸을 옭아 묶는다는 뜻으로, 자기가 한 말과 행동에 자기 자신이 옭혀 곤란하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 자승자박(自繩自縛)이나 ‘자기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자기가 받음’의 의미를 갖는 ‘자업자득(自業自得)’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스불재’의 유행은 노래 가사에서 시작됐다. 고(故) 신해철이 지난 1997년 작사·작곡해 발표한 넥스트의 ‘라젠카, 세이브 어스(Lazenca, Save Us)’라는 곡의 가사 중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라는 부분이 등장한다. 이 노래는 같은 해 방영된 순수 국산 TV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의 주제곡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후 MBC 음악 버라이어티 예능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에서 국카스텐의 하현우가 부른 것이 계기가 돼 널리 퍼졌다.
하현우가 해당 노래를 부른 영상은 유튜브에서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는데, 자연스레 이 노래가 다시 인기를 얻으면서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 널리 회자되고 시간이 지나 이것이 줄어들어 ‘스불재’가 된 경우다.
‘스불재’와 유사한 뜻을 갖는 신조어들로는 ‘지팔지꼰’과 ‘지인지조’도 있다. ‘지팔지꼰’은 ‘지(제) 팔자 지(제)가 꼰다’의 줄임말이고, ‘지인지조’는 ‘지(제) 인생 지(제)가 조진다’의 준말이다. 속담으로는 ‘제 도끼에 제 발등 찍힌다’ 정도가 이에 상응한다.
개그맨 문세윤은 과거 tvN 예능 프로그램 ‘놀라운 토요일’에서 신조어 퀴즈 중 ‘스불재’가 나오자 ‘스님 불교 재밌나요?“를 정답으로 내놔 폭소를 야기했다. 언뜻 불교 용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불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