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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강경록·양승준 기자] 소소한 일상의 재발견. 현재 문화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골목길 여행도 같은 맥락이다. 옛길을 돌며 잊어버렸던 나를 찾는다. 자연이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한가로이 느끼는 여유와 낭만. 골목길 산책은 일종의 도심 속 ‘힐링캠프’다. 이뿐이 아니다. 골목길은 ‘이야기 발전소’다. 굽이굽이 이어져 개성도 다양하다. 구석구석이 보물찾기다. 북촌을 걸으면 전통의 품격에 젖는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에서는 소박한 예술의 향기가, 영등포구 문래동 철강공장 골목에서는 예술가의 이야기가 쏟아진다. 골목길로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다.
서울시에 따르면 북촌관광객은 2010년 1만 7000명에서 2012년 4만 9000명으로 늘었다. 올해는 약 7만~8만명이 다녀갈 것으로 추산했다. 외국인도 한국의 골목길에 빠졌다. 주말 북촌과 이화동 등에 가 보면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서울시는 “북촌 등 골목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은 해마다 30%씩 증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북촌에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최근에는 서촌이 새로운 골목길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또 부암동 골목은 ‘자연길’로 인기가 높아졌다.
▶“사람냄새 나는 길”…서촌의 소박함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와 300m. 참여연대 건물을 지나자마자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 “안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누하동 대오서점을 둘러보던 대학생 조진아(21) 씨는 “이런 곳이 있구나 싶었다”며 웃었다. 일부 기와가 깨져 수리 중인 낡은 한옥 지붕 언저리에 올려진 흑백영화에나 나올 법한 서점 간판 글씨체가 정겹다. 공간은 3.3㎡(1평) 남짓. 손때가 묻은 하늘색 미닫이문을 열자 책 위에 먼지가 뽀앟게 앉았다. 60년 넘은 헌책방이 지닌 세월의 더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책들이 쌓여 기괴함마저 풍겼다. 1970년대 가요집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끔 이 헌책방을 들른단다.
하지만 제구실을 못한 지 오래다. 서점주인 권오남(83) 씨는 남편이 8년 전 세상을 떠났을 때 책을 사고파는 일에서 손을 뗐다. 그럼에도 이 헌책방을 팔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다. 헌책방이 바로 집 대문이라서다. “장사는 무슨…. 서점이 집 통로니 ‘평생 같이 가자’는 생각으로 사는 거지.” 헌책방은 박물관 속 박제된 유물이 아니다. 백발노인이 아직도 일구고 있는 삶의 흔적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답이 나온다. 경복궁의 북쪽인 북촌에는 조선의 상류층인 권문세가가 주로 살았던 데 비해 궁의 서쪽인 서촌에는 궁중 나인과 역관 등 중인이 몰려 살았기 때문이다. 서촌은 조선 전·중기에는 사상과 문학·예술의 중심지로, 후기에는 중인들의 생활·문화의 거점지역이었다. 또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는 문학가·음악가·화가 등이 활동한 근거지가 됐다. 길도 미로처럼 복잡하고 좁다. 세월이 흘러도 큰 변화는 없다.
책 ‘서촌방향’을 낸 설재우 씨에게 이 길의 매력을 묻자 “100년 전 서촌 집적도를 확인해 보니 지금과 90% 정도 일치하더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미국인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서촌애호가’가 됐다. 그는 “서촌은 한옥과 골목길 사이 사람냄새 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에 무릉도원이?” 도심 속 원시길 부암동
부암동 주민센터 오른쪽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약 200m. 바로 ‘무릉도원’이 나왔다.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세운 ‘무계정사’라는 별장터 얘기다. 정선이 그린 ‘몽유도원도’의 모티브가 된 곳이기도 하다. 별장터 바로 아래에는 ‘운수 좋은 날’ 현진건의 집터가 있다. 좀더 올라가면 대한제국 때 법부대신을 지낸 윤웅렬의 별장터도 나온다.
무엇보다 부암동에는 사람의 손이 채 타지 않은 자연이 숨 쉰다. 서쪽 인왕산과 동쪽 북악산 사이 여자의 자궁처럼 들어앉은 곳. 골목은 꼭 시골 산길을 걷는 것 같다. “여기가 시골이야 서울이야?” 이승기가 드라마 ‘찬란한 유산’에서 부암동을 찾은 후 한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 집 사이로 난 좁은 길에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다. 이끼가 수북이 쌓인 담장 위에 빨간 담쟁이덩굴이 억세게 흐른다. 짧게 연결된 골목은 다듬어지지 않아 더 정겹다. 걸을 때마다 새 ‘이야기’다. 담벼락에 병을 깨 시멘트로 발라 놓은 집도 보였다.
서울 광화문에서 차로 7~8분 거리. 서울의 한복판이 맞나 싶을 정도로 원시적 자연의 느낌이 남아 있는 곳이다. 백사실 계곡을 지나 세검정 쪽으로 내려오는 길. 담이 낮은 집 대문 위에 큰 수세미가 매달려 자라는 모습이 동화 같다. 부암동 골목길 산책 중 만난 정미정(50) 씨는 “북촌과 달리 자연스럽고 한적해 사색하기 좋은 곳”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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