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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피아노 앞에 앉은 마에스트로는 여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이따금 허공을 응시하면서도 허투로 음을 내보는 일 없이 한음 한음에 집중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이 오랜만에 피아노 건반 앞에 섰다. “서울시향 감독직을 내려놓겠다”고 공식 입장을 밝힌 지 하루 만이다. 다만 목 디스크 악화로 2부에 예정됐던 ‘메시앙’의 ‘세상의 종말을 위한 사주중’ 연주는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대신했다.
2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프리미엄 실내악: 정명훈의 피아노 앙상블’ 연주회 현장. 정 감독은 1부 시작 전 무대에 홀로 올라와 마이크를 먼저 잡았다.
허리와 목 디스크는 지휘자들의 고질병으로, 정 예술감독도 평소 목과 허리가 좋지 않았다. 이로 인해 지난 5월 지휘가 예정됐던 ‘정명훈과 바그너 II : 발퀴레’ 공연의 지휘를 취소하기도 했다.
서울시향 관계자는 “오후까지 상태를 지켜보다 리허설 전 손열음씨로 변경했다. 메시앙이 워낙 방대한 곡이다 보니 목과 팔에 큰 무리가 있어 부득이하게 1부 모차르트만 연주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했다”며 “연주회를 준비하면서 목 컨디션이 계속 좋지 않아 대비 차원에서 3~4일 전 이 프로그램에 연주 경험이 풍부한 손열음씨를 섭외했다. 페이스북과 문자, 관객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손열음 피아니스트도 정 감독을 대신해 연주하는 부담감에도 멋진 연주를 선보여 청중들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박제성 음악평론가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교롭게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 신구 2등 출신의 실내악 연주회가 된 공연”이라며 “청명하고 고급진 사운드를 발산하는 정명훈의 피아노는 역시나 천하일품”이라고 극찬했다. 또 “이와 대조적인 철근 같은 터치를 구사한 손열음씨도 몹시 정성스러운 연주를 했다”며 “역시 채재일, 과연 루세브, 마지막 루세브의 보잉이 끌어내는 피아니시시시모(pianissississimo·ppp보다 여리게)가 끝나질 않길 바랐다”고 평했다.
한편 정 감독은 전날 같은 장소에서 서울시향의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교향곡 7번 연주를 지휘했다. 이날 단원들은 “올 연말 계약 만료에도 감독직 재계약 서류에 사인하지 않겠다”는 정 감독을 설득하기 위해 공연 뒤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무대 위 스크린을 통해 “서울시립교향악단은 마에스트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마에스트로와 함께 할 것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 정 감독을 응원했다. 서울시향 측은 올 연말 계약 만료 기간까지 정 감독을 설득하겠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