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정에 갇힌 무장간첩 이야기…연극 ‘고래’

6개 극단 ‘협업 시스템’
  • 등록 2010-01-04 오후 5:18:00

    수정 2010-01-04 오후 5:18:00


 
[경향닷컴 제공] “상업연극이라는 불도저가 대학로를 재개발하고 있습니다. 저희 6개 극단의 연대는 순수연극의 ‘알박기’인 셈입니다.” 지난해 5월, 대학로 정보소극장을 공동 운영키로 합의하면서 순수연극 중흥을 표방하고 나섰던 중견 연출가들이 있다. 박정희(52·극단 풍경), 이성열(48·백수광부), 최용훈(47·작은신화), 박근형(47·골목길), 양정웅(42·여행자) 등이다. 이만하면 현재 한국 연극판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들’의 리스트라고 할 만하다. 해가 바뀌면서 새롭게 극장장을 맡게 된 이성열은 “올해부터 연출가 김광보와 극단 청우가 합세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참여 연출가와 극단이 모두 여섯으로 늘었다. 이성열은 “7일 공동 신년회에 6개 극단 연출가와 단원들이 모두 모일 것”이라며 “전부 200명쯤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연극 <고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5월에 연대를 선언했던 그들이 ‘협업 시스템’으로 이뤄낸 첫 성과이기 때문이다. 연출은 극단 골목길의 대표 박근형이 맡았다. 출연진은 극단 백수광부와 골목길의 배우들 가운데 “엄정한 공개 오디션을 거쳐 캐릭터에 가장 잘 맞는 8명을 추렸다”는 것이 박근형의 설명이다. 게다가 중요한 점은 이 협업이 단지 일회성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 연출가 이성열과 박근형은 “올해 여섯 연출가가 다른 극단 단원들과 협업을 계속할 것”이라면서 “우리는 그것을 ‘돌려막기’라고 부른다”며 웃었다.

▲ 이성열씨
<고래>는 잠수정에 갇힌 무장 간첩들의 이야기다. 1998년 6월에 동해안에서 실제 발생했던 북한 잠수정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당시 북한 잠수정은 속초 해안 동쪽 11.5마일 해상에서 어망에 걸려 표류하다 발견됐고, 그 안에 있던 9명은 모두 사망했다. 연극의 모티브만 보자면 자칫 이념 드라마로 비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해다. 연출가 박근형은 “98년 동해에 표류했던 잠수정처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말로 질식할 위험에 처해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 연극은 희박한 산소에 대한 이야기”라며 “풍요가 넘치는 듯한 허상 속에서 점점 질식해가고 있는 우리의 영혼에 관한 문제 제기”라고 덧붙였다.

“어망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게 된 잠수정은 우리가 처한 삶의 막다른 골목과 닮아 있습니다. 그 안의 9명은 자살하거나 서로 총격을 벌이다 죽거나, 질식해 죽었을 겁니다. 결국 우리 모두 산소가 희박한 잠수정에 갇혀 있다는 공감대를 관객에게 전하고 싶어요. 이 연극은 10년 전 북한이 내려보낸 잠수정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축소판입니다. 4대강을 살리고 매스컴도 살리고, 이승만, 박정희 같은 옛날 대통령들도 살려내겠다고 발버둥치는 세상에서 정작 우리의 영혼은 산소가 결핍돼 점점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 박근형씨

1999년 <청춘예찬>으로 그해의 거의 모든 연극상을 휩쓴 이후, 2000년대로 접어들어 한국의 대표적 연출가로 자리매김한 박근형은 “지금 이 시대도 두고두고 웃기고 재미있는 연극거리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또 그는 6명의 연출가가 다른 극단 배우들과 번갈아가며 작업하는 ‘돌려막기’에 대해서는 “배우들과 연출가들의 건강한 긴장감을 지켜내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보소극장 극장장이자 극단 백수광부의 예술감독인 이성렬은 “우리의 공동작업은 대형기획사의 상업성으로부터 연극을 지켜내려는 운동”이라고 자평하면서 “정보소극장이 바로 그 거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극 <고래>는 17일까지. 김학수, 김도균, 박완규, 안성일, 김주헌 등이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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