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새벽 서거한 고(故) 김 전 대통령은 경제정책 면에서 외환위기와 국가부도 사태라는 그늘에 가려져 있다. 하지만 임기 초반 금융 실명제와 부동산 실명거래 등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펼쳤던 인물이다.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시장 개방정책을 펼치면서 정부 숙원사업이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도 이뤄냈다. 하지만 OECD 가입은 급속한 시장개방과 자본 유출입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는 빌미가 됐다.
◇‘목요일 저녁의 충격’..금융실명제 전격 발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던 군사정권을 마감한 김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집권 초기 80%가 넘는 높은 지지율을 등에 업고 금융·부동산 실명제를 도입하는 등 부패 차단에 팔을 걷어붙였다.
‘금융실명제’는 취임 첫해였던 1993년 8월12일 저녁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 발동을 통해 전격 발표됐다. 1982년 발생한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 발생을 계기로 가명과 차명을 쓴 금융거래가 각종 비리·부패 사건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잇따르던 시기였다.
“정경유착 고리 끊는다”..부패 척결에 올인
금융실명제는 당시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홍재형 재무장관이 지휘 하에 철통 보안 속에 준비됐다. 20명의 실무팀은 과천 주공아파트 한채를 두달간 빌려 합숙생활을 했다. ‘현관문을 나설 수 없다’,‘창문가에서 서성대지 않는다’등의 철저한 수칙속에서 생활한 실무팀 공무원들은 ‘금융 실명제’ 작업명을 ‘남북 통일 작전’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들이 ‘목요일 저녁의 충격’이라고 표현할 만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발표였다. 김 전 대통령은 훗날 회고록에서 “기득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선 국회에서 법으로 만들기보다 대통령 긴급 명령이란 형식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이었다”고 설명했다.
적극적 시장 개방..숙원이던 ‘OECD 가입’도
대외적으로는 빠른 경제 성장과 적극적 시장개방을 바탕으로 1996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것이 업적으로 꼽힌다. 정부 차원에서 OECD 가입을 역점 사업으로 정하고 가입 협상을 벌여 성사시킨 일이었다. 당시 야당에선 OECD 가입에 따른 외화출자와 개도국 지원 등 의무 사항이 많은 점을 들어 ‘시기상조’라는 지적이 나왔으나 국민들의 자부심은 한껏 높아졌다. 이후 문민정부는 경제개혁·개방 정책에 속도를 냈지만, 대기업들의 연쇄 부도와 바닥난 외환보유고로 1997년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날 논평을 내고 “김 전 대통령은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 공개제도 도입을 통해 우리나라의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투명한 사회로 나아가는데 기여했다”면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함으로써 한국경제의 위상을 높였고 국민들이 자신감을 가지도록 한 인물”이라고 추도했다. 이어 “경제계는 김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가 투명하고 진정한 선진국이 되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하신 생전의 업적을 기린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