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엔 `유동성 확대` 더블딥엔 `레버리지 축소`

현금 늘어난 대기업들 21개월만에 차입금축소 `시동`
기아차, 1년6개월간 6조원 축소..비우량기업은 여전히 돈 가뭄
  • 등록 2010-08-27 오후 3:20:00

    수정 2010-08-27 오후 3:39:04

[이데일리 이태호 기자] "좀 건방지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요새 금리가 많이 낮아졌다고 하더라도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금융위기 이후 1년 반 동안 우량수출업체들은 현금흐름이 좋아진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제 막 더블딥 얘기가 오가는 판에 누가 굳이 레버리지를 확대하려 하겠습니까. 차입금을 계속해서 줄이고 있습니다. 금융회사들이야 내 돈 이제 누굴 빌려주나 고민하고 있겠죠."

27일 한 대형 제조업체 자금담당 임원의 말이다. 2008년 말 금융위기가 얼마나 깊게, 오래갈 지 모른다는 우려는 대기업들의 현금보유 욕구를 크게 자극했다. 2008년 연간 1조2000억원에 불과했던 일반회사채 순발행 규모는 이듬해 44조9000억원으로 급증, 기업들의 치열한 `생존` 투쟁을 극명히 드러냈다.

하지만 금융위기와 함께 진행된 환율 상승은 수출이 국내총생산(GDP)의 60%를 차지하는 우리 경제의 빠른 회복을 이끌고 있다. 일부 수출업체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고, 제조업체 평균 설비가동률은 23년 만에 최고로 치솟았다.

수출 대기업 계좌에는 계속해서 현금이 쌓였고, 이중 다수는 시장 금리가 연중 최저치를 연일 갈아치우는 상황에서도 차입금 순상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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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채, 21개월만의 `순상환`
 
한 증권사 회사채인수 담당자는 "6~7월 이후 물량 공백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우량 대기업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회사채시장에서 최근 기업들의 발행 타진(tapping)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증권사의 인수 담당자는 "폭풍전야일지도 모른다"면서 늘어난 설비가동률이 대기업들로 하여금 다시 자본시장 문을 두드리게 할 것이란 기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최근 현저한 영업 위축에 대해선 씁쓸함을 감추지 않았다.
 
▲ 월별 일반회사채 순발행액(자료:한국예탁결제원)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일반회사채 순발행액은 지난달 21개월 만에 순상환으로 돌아섰다. 2008년 11월 이후 무려 20개월에 걸쳐 진행된 순발행 기조가 일단락된 것이다. (왼쪽 그래프)
 
상환액을 차감하지 않은 전체 발행물량도 크게 줄고 있다. 이데일리DCM(Debt Capital Market) 리그테이블에 따르면, 금융투자회사가 인수한 일반회사채와 기타금융채, 자산유동화증권(ABS)은 올 4월 8조5000억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3개월 연속 줄어들었다.
 
8월 상황도 마찬가지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이달 들어 현재까지 발행된 회사채와 기타금융채 물량은 약 5조6000억원으로 7월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같은 발행 감소는 발행 여건이 더욱 개선된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끈다. 이달 AA- 회사채 일평균 민평금리는 4.62%로 대기업 자금조달이 대거 몰렸던 지난해 상반기 6.0%를 크게 밑도는 상황이다. (아래그림)

◇ 우량회사는 `5조원 상환`, 비우량사는 `돈가뭄`

최근 차입금 순상환으로 회사채시장의 관심을 샀던 대표적인 기업은 기아차(000270)다. 기아차의 연결기준 차입금은 2008년 말 12조원대로 정점을 찍었으나, 올 상반기말 7조원대로 무려 5조원이 줄었다. 늘어난 현금성자산 1조원까지 합하면 실질적으로 6조원의 빚이 사라진 셈이다.
 
▲ AA- 신용등급 기업의 자금조달금리 변화
같은 기간 현대차(005380)는 9000억원의 총차입금을 줄였고, SK에너지(096770)는 5000억원을 줄였다. 현대중공업(009540)은 올해 들어 3000억원을 줄였고, LG화학(051910)은 1분기동안 1500억원의 총차입금(회계기준 변경 미적용)을 축소했다.
 
대한항공(003490)아시아나항공(020560)도 항공수요 회복 등에 힘입어 상반기 동안에 각각 3500억원과 1500억원의 총차입금 축소를 기록했고, S&T중공업(003570)은 51년 만에 무차입경영을 선언했다.
 
이같은 차입금 축소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대기업 주도의 경기회복 덕분에 가능했다. 지난해 1분기 전년동기비 -4.2%를 기록한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이후 5개 분기 동안 -2.2, 0.9, 6.0, 8.1, 7.2%의 드라마틱한 회복 추세를 보였다.

하지만 현금흐름 개선과 `빚 갚기`는 대기업들만의 잔치라는 지적도 있다.
 
신환종 우리투자증권 크레딧애널리스트는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의 유동성 공급 혜택이 대부분 대기업에 집중되면서 현금흐름도 부익부 빈익빈을 낳았다"면서 "더블딥 우려 등으로 여전히 경기에 보수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회사채투자자 입장에선 비우량 채권을 계속 외면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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