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말 SK하이닉스(000660) 기업설명회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한 증권사 연구원이 “애플의 수요 예측이 엇나가는 탓에 생긴 부품 재고를 소진하느라 너무 낮은 가격으로 팔리는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SK하이닉스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권오철 사장은 “다 알면서도, 멀리 보고 공급하고 있다”며 말끝을 흐렸다.
사사키 노리오 도시바 사장은 몇 달 전 애플 아이폰4S에 대한 낸드플래시 공급계약을 두고 크게 화를 냈다. 애플의 잘못된 수요 예측 탓에 악성재고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전력’이 전공인 노리오 사장은 “반도체 사업 제대로 하라”고 일갈했다. 도시바는 결국 감산을 결정했다.
이에 반기를 든 곳이 바로 삼성전자(005930)다. 애플의 잘못된 수요 예측이 몇 차례 계속되면서부터다. 삼성전자가 생산한 애플 맞춤 부품은 고스란히 악성재고로 쌓였다. 재고를 등에 업고 가격 인하를 은근히 주장하는 애플의 압박은 삼성전자에게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다.
실제로 삼성전자 LCD사업부(현 삼성디스플레이)는 아이폰4S부터 LCD를 공급하지 않았다. 아이폰5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메모리사업부도 올 들어 범용 낸드플래시를 공급하지 않았다. 한 관계자는 “차라리 모든 부품 계약을 끊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다.
애플은 이견이 없는 ‘혁신’의 대명사다. 혁신(革新)은 글자 그대로 가죽을 벗겨내면서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이다. 스마트폰 시대를 연 애플은 분명 혁신기업이다. 하지만 구매에 있어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부품기업과의 협력에서도 세상을 놀라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부분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애플은 진정한 혁신기업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