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은 최종건 회장의 35주기를 맞아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일 고인의 지인과 SK그룹 전·현직 임직원 등이 모인 가운데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추모식을 연다.
추모식에는 고인과 가까웠던 남덕우 전 총리, 이승윤 전 부총리,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또 최신원 SKC 회장과 막내 아들 최창원 SK케미칼(006120) 부회장, 조카인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유가족과 SK 관계사 전·현직 CEO 및 임직원들도 함께 자리할 계획이다.
최 회장은 1953년 4월 6·25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수원시 평동 벌판에서 직기 20대의 선경직물을 창업했다. 최 회장은 창업 후 특유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결단력으로 단기간에 선경직물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전쟁 후 직물업계의 생산과잉 등으로 녹록치 않던 경영환경을 제품 차별화로 정면 돌파했다.
`품질 제일주의`를 사시로 내걸고, 1955년 ‘닭표 안감’과 ‘봉황새` 이불감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진가를 인정받았다.
최 회장은 1950년대 말 대일통상 중단 및 태풍 사라호 피해 등으로 직물업계에 사상 유례없는 불황이 닥쳤음에도 과감한 시설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1958년부터 국내 최초로 합성직물인 나일론, 데도론 등을 생산하는데 성공, 직물업계를 평정해 나갔다.
그러나 최 회장은 승부수를 정부의‘수출 드라이브’에 찾아 국내 직물업계 최초로 해외수출에 나섰다.
선경직물은 1962년 4월 홍콩에 닭표 인조견 10만마(1만3,000달러)를 첫 수출했고, 그해에만 4만6000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린 공로를 인정받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후 선경직물은 1970년대 최대 수출품목으로 떠오른 섬유산업을 주도하며 한국 경제가 본격적인 수출시대를 여는데 견인차 구실을 했다.
1960년대초 원사파동으로 회사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은 최 회장은 안정적인 원사 확보를 위해 원사공장을 직접 설립하기도 했다.
막대한 재원과 기술 확보 문제 등으로 회사 내부에서 조차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지만 최 회장은 특유의 추진력으로 일본 상업차관 및 기술 도입, 정부로부터의 외자 대부 등을 차례로 성사시켰다.
마침내 1968년 12월과 1969년 2월 아세테이트 공장과 폴리에스터 공장이 차례로 완공됐고, 선경은 국내 총 원사 생산규모의 26%를 담당하게 됐다. 특히 선경은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터 원사와 아세테이트 인견사를 동시에 생산해 국내 원사 메이커의 1인자로 도약하게 됐다.
당시 선경직물이 석유정제를 통해 생산하는 원사 사업에 진출한 것은 향후 SK그룹이 석유사업에 진출하는 토대가 됐다. 또 SK그룹이 석유사업과 정보통신 사업을 양축으로 매출 80조, 재계 3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시발점 구실을 했다.
미국 시카고대학 유학 중 부친의 갑작스런 타계로 귀국한 동생 최종현을 부사장에 임명, 최종건 회장의 ‘패기’에 최종현 회장의 ‘지성’이 더해지면서 SK그룹의 질적인 도약이 시작됐다.
최종현 회장은 정부의 인견사 공매불을 매입해 확보한 원사를 직물로 생산판매함으로써 자금사정을 호전시켰고, 선경직물의 생산체제를 내수 중심에서 수출 위주로 전환시켰다.
또한, 1966년 1월 선경직물을 원사 메이커로 도약시킨다는 내용 등을 담은 ‘선경 5개년 사업계획’을 토대로 형과 함께 원사공장 설립을 성공시켜 SK그룹 100년의 기반을 다졌다.
최종현 회장은 형 타계 후 신문에 기고한 ‘형제’라는 칼럼에서 “형님이 살아 계실 때 이상으로 잘해서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형님의 유훈이라고 믿고 있다”며 형에 대한 존경과 사업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실제로 최종현 회장은 원사사업 진출로 초석을 놓은 석유사업 진출을 성공시켜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것은 물론, 정보통신 사업 진출 등을 통해 ‘글로벌 SK’의 기반을 굳건히 하는 것으로 형의 기대에 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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