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더 내고 덜 받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상정시키고 초조하게 표결판을 바라봤다. 찬성 123명, 반대 124명, 기권 23명. 결과는 부결. 한나라당의 반대표는 물론이고 유 장관을 못마땅하게 여긴 통합신당모임에서 무더기로 기권표를 던진 결과였다.
뒤이어 국민연금법 개혁을 전제로 만들어진 기초노령연금이 상정됐다. 본회의장에는 대한노인회 소속 노인 80여명이 방청객으로 앉아 지켜 보고 있었다. 여야는 오래간만에 한목소리로 어르신들의 노후를 나라가 돌봐야한다고 외쳤다.
표결판에 찍힌 숫자는 찬성254표, 반대 9표.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다. 법안을 제출했던 유 장관은 오히려 반대표를 던진 코미디가 연출됐다.
▨ 그로부터 석 달 뒤 국회 본회의가 다시 열렸다.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드디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법안의 모양새는 바뀌어있었다. `그대로 내고 덜 받는` 형태로 당초보다 후퇴된 개혁안이었다. 지난 4월 통과됐던 기초노령연금의 혜택을 더 늘리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공무원연금 등 특수직역연금 개선을 함께 논의하자는 조항은 슬쩍 빠졌다.
◇ 얄궂은 운명
3년 9개월동안 몸살을 앓았던 국민연금개혁안의 국회 통과 과정은 이랬다.
국민연금 개혁이 왜 필요한지, 국민들의 노후를 어떻게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실종돼 있었다. 정치인들은 눈 앞에 보이는 표심만을 의식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국민연금의 운명만 또 얄궂게 됐다. 어설프게 고쳐진 탓에 또 수술대에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벌써 국민연금과 기초노령연금과의 통합, 더 나아가 기초연금 신설과 함께 수정적립방식(소득재분배 기능이 있는 구조)을 가입자가 낸만큼을 나중에 돌려받는 소득비례연금으로 이원화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거의 전 국민이 대상인 국민연금이 이렇게 정치인들의 이기주의에 휘둘려서는 훗날을 절대 기약할 수 없다. 국민연금이 공적연금의 간판이라는 위치적 중요성 때문이다. 게다가 국민연금은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등 특수직역 연금의 개혁과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가입자가 직업군으로 갈라져있는 연금간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개혁의 전제조건인 `사회적 합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안그래도 연금간 형평성 문제는 개혁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으로 솟아있다. 연금 가입자가 연금을 이동했을 때, 예를들어 공무원연금 가입자가 국민연금으로 바꿨을 때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하는 연계문제도 걸려있다.
◇ 개혁해도 임시방편..언제 또 구멍날까
국회의원들이 고친 국민연금 제도를 살펴보자. 보험료는 현행과 같이 평균 소득의 9%를 내면된다. 당초 2018년까지 12.9%로 점진적인 인상을 하려던 계획이 무산되고 국민들의 보험료 부담을 더 늘리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다.
현재 소득의 60%를 주고 있는 급여율은 올해 50%로 낮추고 2009년부터 매년 0.5%포인트씩 내려 2028년까지 40%로 조정된다.
예를 들어 기준 소득이 250만원인 직장인이 20년동안 국민연금 보험료를 냈을 경우 현행과 같이 보험료를 월 평균 11만2500원(본인부담) 낸다. 반면, 받는 연금의 경우 기존 제도하에서는 월 64만원이 주어지지만, 개정안에 따르면 48만원만 받게 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는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현행 제도를 유지하면 연금 지급을 위한 잠재부채가 하루 800억원, 연간 30조원씩 쌓인다고 분석했다.
결국 정치적 산물인 국민연금 개정안은 언제든 또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으로 계속 남아있는 것이다.
지금 20대 청년들이 40년뒤 연금을 한푼도 받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처방을 찾지 않을 수 없다.
◇ 근본적 처방 어떻게?..DC형 전환· 기금 분할 검토
최근 경제부처를 중심으로 국민연금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확정기여형(DC)`으로 전환해야한다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외부 강연이 있을 때마다 국민연금의 DC형 전환을 얘기하곤 한다. "너무 앞서나가는 것 아니냐"며 고개를 갸우뚱했던 변재진 보건복지부 장관도 DC형 전환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선회했다.
현재 국민연금은 기금의 운용실적과 관계없이 가입기간과 소득에 따라 연금 수령액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만, DC형으로 바뀌면 민간펀드와 같이 기금 운용실적에 따라 수령하는 연금액이 달라진다. 스웨덴은 DC형으로 전환한 후 안정적으로 연금제도를 안착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DC형은 국가의 책임은 사실상 없어지고 연기금 운용자와 상품을 선택한 가입자들이 모든 것을 떠안는 구조다. 따라서 가입자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와함께 200조원이 넘는 거대한 국민연금 기금을 쪼개서 운용하는 `연금 분할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가 지속되고 있다. 이 역시 스웨덴을 벤치마킹한 것.
연기금이 시장 규모에 비해 과도하게 커지는 `연못 속에 고래`가 되는 위험을 분산하고 각 운용주체별 경쟁을 유도해 수익률을 올리겠다는 취지다.
국민연금 수익률이 1%포인트 늘어나면 100만명의 1년치 연금 지급분을 충당하고 연금 고갈 시기를 5년 연장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복지부는 "가입자 연령대별 또는 자산 종류별, 자산 만기별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국민연금 기금 운용 분할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 국민연금 가입자 불만 고조
최근에는 인수위의 연금개편안이 주목을 끈다.
인수위안은 갈라져 있는 국민연금과 기초노령연금을 통합해, 소득비례연금으로 연금 지급액을 줄이는 대신 65세 이상 노인 80%에게 소득의 10~20% 정도의 기초연금을 주겠다는 내용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찬반논란이 뜨겁다. 연금 혜택의 사각지대를 줄이고 운영비 절감을 위해 연금통합이 필요하다는 입장과 후세대 연금 부담을 기하급수적으로 확대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맞서고 있다.
김용하 순천향대 교수는 "350만명의 노인들이 기초노령연금을 받기 위해 서류를 제출하고 지방자치단체에서 일일이 관리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비용"이라며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통합 관리하게 되면 기초노령연금 도입에 따른 관리 운영비는 거의 안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며 그동안 연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던 사각지대도 많이 해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금보험팀장은 "국민연금 역사가 짧아 아직 연금 수급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사각지대가 과대포장된 면이 있다"며 "기초노령연금은 국민연금의 본격적인 수급확대 전까지 보완적인 것이 되야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 손자 세대들의 허리가 휘어질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배 교수는 "국민연금을 개혁하자마자 또 국민연금법을 완전히 뜯어고쳐서 얻는 실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대통령 당선자는 해묵은 과제이며 당장 시급한 과제인 공무원연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얘기를 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 국민연금 가입자들 사이에선 정부가 공무원연금등 특수직역연금은 그대로 놔둔 채 국민연금만 깎아 `왜 우리 몫만 깎느냐`는 불만과 원성이 높다.
그러나 인수위는 현재 공무원연금 개혁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겠다는 것 외에 (공무원연금 개혁에 대해)밝히고 있는 바가 없다.
[취재지원 = 한국언론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