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재벌총수가 UFO를 사겠다고 우긴다면

상법 바꿔야 승자의 저주 줄어든다
  • 등록 2010-11-23 오전 10:55:05

    수정 2010-11-23 오전 10:55:05

[이데일리 이진우 기자]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과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 이 두 재벌 그룹이 대우건설은 쳐다도 안보고 현대건설(000720)만 인수하겠다고 서로 싸우는 것은 건설 회사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 게 `현대건설`이기 때문임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현대건설 인수전을 둘러싸고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까닭이다.
 
현정은 회장은 대놓고 아예 현대그룹의 적통성을 찾겠다는 것을 인수의 제 1명분으로 내세웠다. 시아버지(정주영)와 남편(정몽헌)의 손때가 묻은 회사를 찾아 오겠다는데 기업의 적정가치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또 현대건설이 갖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을 빼앗기면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내놔야한다는 위기감은 물불 가릴 틈을 주지 않았다. 적정가치야 상대편에서 알아서 계산했을 것이고 이쪽은 그보다 더 써내기만 하면 된다는 게 양쪽의 내심이었을 터다.
 
그러다 보니 여러가지가 꼬인다. 이론적으로는 승자의 저주를 제일 걱정하는 쪽이 승자 자신이어야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내색이 없다. 엉뚱하게도 금융감독당국의 속이 제일 탄다. 모든 뒷탈은 관행상 일단 그 쪽 책임이기 때문이다. 인수 후보자를 결정하는 채권단은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다.
 
현대건설이 프랑스 은행에 넣어뒀다는 1조2000억원의 정체를 두고 벌이는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돈을 내기로 한 현대그룹도 별 말이 없고 그 돈을 받기로 한 채권단의 입장은 어정쩡한데 그 돈의 정체를 까봐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는 쪽은 제3자인 금융감독당국이다.
 
프랑스 은행에 있다는 돈의 성격이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왜 우선협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면밀히 살펴보지 않고 다 끝난 후에 뒤늦게 조사를 하자고 소란을 피우는 걸까.
 
각자의 속을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있다. 현대건설에 돈을 빌려줬다가 떼이고 주식으로 받아서 갖고 있던 채권단은 그 주식을 단돈 1원이라도 더 주겠다는데 팔면 그만이다. 위조지폐만 아니라면 돈의 정체나 사연은 채권단의 관심 밖이다. 현대그룹이야 회장님의 결심이 섰으니 고민할 게 없고 돈을 동원하는 현대그룹 계열사의 주주들은 이 문제에 대해 발언권이 현행법상 없다. 나중에 현대그룹이나 현대건설에 문제가 생기면 잘못 팔았다고 욕을 먹을 게 두려운 금융감독당국이 중간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형국이지만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를 밖에서 제3자가 몸으로 막는데는 한계가 있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알려진 바대로 현정은 회장의 결심이 가장 큰 요인이다. 그런데 거기에 동원되는 자금은 현 회장 개인 자금이 아니라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 등 계열사의 돈이다. 그렇다면 그 계열사의 주주들에게 그런 큰 돈을 써도 되는지 물어보는 게 마땅한데, 현행 상법에는 그런 규정이 없다.
 
상법에는 `합병이나 중요한 영업양수도`의 경우는 이사회의 결정만으로는 안되고 주주총회의 특별결의를 거쳐야 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현대건설 같은 특정 회사의 주식을 인수하는 것은 특별결의를 요하는 항목에서 빠져 있다. 이사회를 주무르고 있는 재벌총수 한명이 계열사 자금을 총동원하는 대형 M&A를 결정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구조다. 
 
그렇다면 전 계열사의 자금을 총동원해서 특정회사 주식을 사들여 인수하는 결정이 합병이나 영업양수도에 비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결정이라는 뜻일까. 어쨌든 그런 까닭에 승자의 영광은 인수를 결심한 회장에게 돌아가고 혹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승자의 저주는 승자의 결심 과정에서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못한 계열사와 주주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어 돌아간다.
 
승자의 저주를 가장 두려워해야 할 주체가 이론적으로는 승자 그 자신이지만 그 두려움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영광은 독식하고 피해는 나눠갖는 그런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적어도 현대건설 인수처럼 회사의 존망이 걸린 큰 결정이라면 주주총회의 특별결의를 통과할 수 있는, 적어도 67%의 주주들의 찬성은 얻어낼 수 있는 결정이어야 합리적이다. 그런 동의를 끌어낼 자신이 없다면 현정은 회장이나 정몽구 회장이 밖으로 나가 `현대그룹 적통 살리기 펀드`를 모집해 거기에 찬성하고 동의하는 사람들의 자금으로 시도해야 마땅하다.
 
생각해 보면 주주총회 특별결의라는 조항은 그러라고 만든 조항이다. 평소에는 이사회가 결정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일은 이사회가 혼자 결정하지 말고 주주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굳이 따로 만들어 놓은 조항이다. 자칫하면 그룹 전체가 망할 수 있는 그런 결정에 이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언제 적용하겠다는 뜻일까.
 
지금은 총수가 결정하면 뒷일이야 어떻게 되건 일단은 다 가능하도록 되어 있으니 그룹 내부의 신중론자들이 목소리를 낼 여지가 없다. "회장님의 뜻은 옳지만 그 큰 뜻을 모르는 주주들이 아마 반대할 겁니다. 일단 참으시지요"라는 요령있는 조언이라도 통할 수 있도록 상법을 빨리 바꿔야 한다.
 
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부하 직원들이 뭔가가 안되겠다고 보고하면 "당신 그거 해 보기나 했어?"라며 질책했다고 한다. 아마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의 두 총수 역시 이번 현대건설 인수전을 독려하며 직원들에게 자주 쏘아부쳤을 말이었지 싶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이 직원들에게 더 자주 했던 말은 이런 말이다. 결제서류를 들고 온 직원에게 던지던 질책이라고 한다. "이게 니 돈이라면 이렇게 하겠어?"
 
아마 현대건설 인수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양사 직원들과 계열사 주주들이 마음 속에만 품고 차마 입밖에는 꺼내지 못했던 대사가 아니었을까.
 
언제까지 주주들의 돈을 그룹 오너의 개인적 한(限)을 푸는데 쓰도록 놔둘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릴 때가 이제는 됐다. 일정 규모 이상의 M&A는 이사회의 결정이 아니라 주주총회를 통해 주주들의 의견을 직접 묻도록 상법을 바꾸는 게 우선이다. 무리한 인수합병이라면 아무 권리도 없는 감독당국보다는 주주들이 나서서 브레이크를 거는 게 합리적이고 효과적이다.
 
그로 인해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투자같은 미래를 내다본 결정이 무산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의 법대로라면 그룹 회장이 우주인에게서 UFO를 사들이겠다고 결정하더라도 전 계열사가 거기에 동원되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 관련기사 ◀
☞채권단, 현대그룹에 자금조달 증빙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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