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찾아서)⑪금융, `희망 생산지`로 변하라

  • 등록 2008-12-29 오후 1:35:21

    수정 2008-12-29 오후 6:29:53

[이데일리 하수정기자] '가동중단, 감산, 감축, 공포, 추락, 비상경영···'
한국 경제 현장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말들이다. 그만큼 경제흐름이 만만치 않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옮겨가면서 산업 현장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수출과 내수 모두 빨간 불이 들어오면서 IMF 외환위기 이후 10년여만에 찾아온 위기라는 말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 모두들 내년이 더 걱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위기를 직시하되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우리는 달러가 없어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나라를 수년만에 세계 5대 외환보유국으로 바꾼 저력을 발휘했다. 세계개발은행은 이를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기적은 또 있다. 전쟁 폐허를 겪은 세계 최빈국을 수십년만에 메모리반도체· LCD· 디지털TV· 조선 세계1위, 조강(철강)생산 세계5위, 자동차생산 세계6위의 10대 세계경제대국으로 탈바꿈시키는 힘을 보여줬다. 

희망이 없으면 노력도 없다고 했다. 희망만 가지면 그곳에서 행복의 싹이 움튼다고도 했다. 위기가 불러오는 불안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외환위기를 극복해 낸 경험이 축적돼있고, 10년전에 비해 크게 개선된 산업경쟁력과 기술력, 우수한 인재를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다.

이제 그 자산을 써 볼 '기회'가 왔다. 위기는 곧 기회다. 희망을 이야기하고,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땀 흘린다면 위기극복이라는 알찬 열매가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편집자)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지난 19일 오후 영업 일선 책임자인 33명의 영업지원 본부장들을 긴급 소집했다.

강 행장이 이례적으로 직접 일선 영업지원본부장들을 본사로 불러들인 것은 중소기업 지원을 주문하기 위한 것. 1240개의 영업점을 지역별로 총괄하고 있는 영업지원 본부장들은 이날 강 행장으로부터 중소기업의 애로점을 해결해주라는 당부의 말을 단단히 들었다.

각 지점의 기업조사역(RM)들은 거래 기업들을 직접 방문해 재무 상황을 점검하고 지원안을 논의하는 등 하루 종일 발로 뛰어다니고 있다. 행장부터 직원까지 지원할 중소기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다니는 상황으로 바뀌게 됐다.

통상적으로 12월은 기업대출이 감소한다. 기업들은 연말 부채비율을 줄이기 위해 수금을 하고 은행 빚을 갚는다. 게다가 경기 하강기에는 신규 투자를 꺼려 대출금이 감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올해는 상황이 다르다. 글로벌 신용경색으로 수출입 기업들은 거래처로부터 대금 회수가 쉽지 않고 환율 변동이나 자금조달 기간 미스매치 등 외부 불안 요인에 따른 자금 수요가 발생하고 있다.

은행들은 지원해야할 기업들을 발굴하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자금을 적재적소에 투입해 우량 기업의 흑자도산을 막고 일시적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성장기업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은행들은 "정부의 강압이나 여론의 비판에 등 떠밀려 이 같은 노력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시중은행의 여신 담당자는 "대형 건설업체가 부도나면 그 부실채권을 견딜 수 있는 은행이 몇 곳이나 있겠는가. 결국 기업과 가계가 살아야 은행이 살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서 은행과 기업은 갑(甲)과 을(乙)의 관계가 아닌 공생(共生) 관계다"라고 강조했다.

◇ 공생의 필수요건 `자본확충`

"솔직히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맞추는 것은 쉽습니다. 부실 가능성 있으면 대출 안해주고 기존 대출 회수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자본 확충에 대출 확대까지 둘 다 하려니까 어려운 것이지요. "

금융감독당국이 은행들에게 자본 확충과 대출 확대를 동시에 주문하자 시중은행에서는 이 같은 탄식이 나왔다.

자체 생존을 위협받는 은행들에게 무조건 기업을 지원하라고 종용해봤자 효과가 없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은행이 기업 곳곳에 자금 수혈을 해주기 위해서는 우선 은행의 자본이 탄탄하게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부는 은행들에게 자본적정성을 최우량 수준인 자기자본비율 12%, 기본자본비율 9%이상으로 끌어올리라고 주문했다.
 
▲ 4대 은행 연말 BIS비율 예상치

각 은행들은 4분기 내내 자본 확충해 `올인`해 대부분 목표치를 달성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KB금융(105560)지주로부터 5000억원을 지원받고 국내외 재무적 투자자에 자사주를 매각하는 것 뿐 아니라 포스코, 현대상선 등과의 지분 맞교환도 성사시켰다.
 
신한은행은 신한금융(055550)지주가 8000억원을 증자하고 우리금융지주(053000)도 우리은행에 7000억원의 자본을 투입했다. 하나은행은 하나금융지주(086790)로부터 총 1조5000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지원받는다.

이와 동시에 각 은행들은 후순위채권을 발행하고 하이브리드채권 발행을 추진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은행들은 일단 연말 BIS 비율을 맞추기 위한 자본 확충 작업을 일단락했지만, 내년부터 기업 지원작업과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 추가적인 자본 확충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했다. 정부의 경영간섭을 감내하고라도 20조원 규모의 자본확충펀드에 손을 벌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기업이 부도나면 우리 경제의 기둥이 상처날 수 있고, 은행이 파산하면 뿌리까지 흔들릴 수 있다"며 "은행의 자본 확충은 실물 경기 침체의 충격을 완충할 수 있는 필수 요건"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그동안 무리한 인수합병(M&A)을 해온 재벌 계열사나 대규모 미분양이 해소되지 않은 대형 건설업체에 문제가 발행할 경우 올해 은행들이 쌓아놓은 자본만으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면서 "자본확충펀드를 비롯한 차기 대비책도 구상해놓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사표 내걸고 일해봅시다" 위기 진원지서 희망 생산지로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22일 아침부터 시중은행장 7명을 불러 중소기업 대출 실적이 부진하다며 강도높게 질책했다. 
 
이에 대해 은행들은 억울하다는 입장을 숨기지 않았다.
 
연말이라는 계절적 요인에 중소기업을 돕기 위해 실시한 예대상계 등 특수 요인을 감안하면 오히려 중소기업 실적은 확대됐다고 봐야한다는 항변이다.  
 
국민·신한·우리·하나·기업·외환 등 6개 시중은행들의 중소기업 대출잔액은 지난달 말 300조3700억원(사모사채 제외)으로 지난 10월 잔액 297조원보다 1.17% 증가했다. 9월 대비 10월 대출 증가율 0.8%보다 증가 폭이 확대된 것이다.
 
이달들어 지난 22일 기준으로는 299조7000억원으로 지난달 말 대비 감소했지만 연말기준으로 비교하면 증가추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예금을 해지해 대출금을 갚는 `예대상계` 규모가 기업은행 2500억원, 우리은행 1700억원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예년에 비해 중소기업 대출이 상당히 활발했던 것으로 은행권은 분석하고 있다.   
 
은행들은 일제히 내년 상반기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중소기업 대출의 상환을 유예하고 `패스트 트랙`과 `대주단 협약` 등을 통해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각 은행별로도 다양한 지원책을 강구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신용보증기금에 1000억원을 특별출연하는 방안을 고안해냈다. 신보 특별출연으로 대출 전액에 대해 100% 정부 보증을 받음으로써 중소기업 대출을 확대할 뿐 아니라 BIS비율 산정시 위험가중치도 줄이는 이중 효과를 얻기 위해서다.
 
하나은행 역시 신보 특별출연을 통해 중소기업 대출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기업은행은 기술보증기금, 현대차그룹과 손잡고 1000억원 규모의 상생협력펀드를 구성하고 협력 중소기업을 지원키로 했다.
 
우리은행의 경우 태양광산업, 로봇산업 등 성장산업을 지원하는 특화대출상품을 발빠르게 내놓기도 했다. 
 
그동안 외형경쟁과 단기 외화차입 확대로 최근의 경제위기를 몰고온 주범으로 비판받고 있는 은행들은 `변해야 산다`는 말을 어느때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신한은행 전 임원진들이 지난 달 일괄 사의를 표명하면서 "사표를 내걸고 열심히 일해보겠다"는 결의를 다진 사례는 은행들의 절박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은행들은 이제 위기의 진원지라는 오명을 뒤로하고 희망의 생산지로 변화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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