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제공] 내 고향의 하늘엔 자주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순두부 같은 구름이 떠다녔다.
문경군 마성면 하내리(아랫나실), 10여 년 전 홀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문득 이 세상의 고아가 된 나는 생각만 해도 배고픈 고향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한국전쟁 전후의 폐허 속에서 청상과부나 마찬가지였던 어머니는 본가인 하내리의 외삼촌을 의지처로 삼아 생계수단으로 구멍가게를 차렸고, 동생인 작은 외삼촌은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어머니의 세 평짜리 '점방'은 농부와 막장 광부들에게 막걸리를 파는 주점이자 온갖 생필품을 파는 백화점이요, 감기약 등을 파는 약국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억척의 홀어머니는 시골백화점의 주인이자 술집 작부요, 약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난이란 것은 한번 붙으면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찰거머리 같은 것.
그 시절 철없던 나는 재 너머 시오리 길의 가은중학교에 다녔다. 하교 길이면 허기진 배를 달래려 찔레 순이며 산딸기며 오디를 따먹었다. 하지만 배고픔이란 짐승은 쉽사리 달래지는 것이 아니었다. 집에 오자마자 "엄마, 밥 줘!" 소리쳐 보지만 물건을 떼러 간 어머니는 아직 점촌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어머니가 없는 집은 마을 초입 산그늘 속의 상여 집 같았다. 배는 고프고 눈물이 핑 도는 바로 그러할 때 나의 해방구는 바로 외갓집이었다.
책 보따리를 집어 던지고 돌담 길을 돌아가면, 언제나 머리에 흰 수건을 둘러쓴 작은 외숙모가 마당에서 손두부를 만들고 있었다. "원규 왔나, 배고프쟈?"
작은 외숙모는 따끈따끈한 손두부와 막김치, 조선간장에 고춧가루를 풀고 참기름을 살짝 친 양념장을 소반에 담아 툇마루에 놓아주었다. 한 입 떠 넣은 손두부는 눈물겹게 보드랍고 따뜻했다. 나는 아직도 고향 하늘의 순두부 같은 구름을 볼 때마다 저 구름을 퍼다가 틀에 넣고 삼베로 거르고 돌로 눌러 외숙모처럼 손두부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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