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로 시집 온 14세 소녀…'코스 요리'로 미식혁명 활짝[미식가의 세계]②

  • 등록 2024-10-04 오전 8:17:03

    수정 2024-10-04 오전 8:17:03

인류의 역사는 음식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우리의 밥상은 이미 과거의 밥상이 아니다. 조선후기의 기록에 성인남자는 7홉의 쌀로 한 끼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지만 이제는 사실이 아니다. 최근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집계가 시작된 196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한 끼에 평균 밥 반 공기 정도로 버티고 있다. 반면에 육류소비량은 쌀 소비량을 추월하고 있다. 지난해 돼지, 소, 닭고기 등 3대 육류 소비량은 1인당은 60.6㎏으로 쌀 소비량을 넘어섰다. 우리경제의 산업화는 외식산업의 발달과 함께 식생활의 서구화를 가져왔다. 우리의 식탁에 20년 전만 해도 볼 수 없었던 브로콜리, 셀러리, 파프리카가 등장하고 식당에는 부대찌개, LA갈비 같은 정체가 모호한 음식들이 팔리고 있다. 인스턴트식품과 배달음식의 소비는 날로 늘어가고 있다. 한 시대의 음식문화 발전에는 항상 그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이 존재한다. 그들은 새로운 식재료와 요리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즐기며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식기와 식탁예절을 도입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오늘날의 음식문화를 만든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때이다.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 프랑스의 음식문화는 카트린 데 메디치(1519~1589)의 등장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뉜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프랑스음식이 과연 오늘날의 격조를 갖추었을까 하는 의문이 다 들 정도이다. 사실 카트린은 음식뿐 아니라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꽃피운 피렌체 문화예술의 진수를 프랑스에 고스란히 전수한 위대한 공로자라 할 수 있다. 카트린은 피렌체의 통치자였던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의 딸로 가문의 합법적인 상속인이자 후계자였다. 그러나 출생 직후 양친을 잃는 등 우여곡절 끝에 14살의 어린 나이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차남 앙리와 결혼하여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되었다.

맏아들 프랑수아가 죽고 앙리 왕자가 앙리 2세로 등극하자 카트린은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용모는 출중하지 않았지만 지리학, 물리학, 천문학 등에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카트린은 튈르리궁과 쉬농소성 등 여러 궁전과 정원의 건설 및 증축에 깊숙이 관여할 만큼 건축에도 재능이 있었고, 화술도 뛰어났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구사할 줄 아는 교양인이었다. 화가이자 건축가로 유명한 조르조 바사리는 그녀에 대해 “따뜻한 마음과 친절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 때문에 초상화를 남겨 두고 싶은 여성”이라는 말을 남겼다.

카트린과 결혼한 직후 앙리 2세는 20세 연상의 과부이자 자신의 가정교사였던 디안 드 푸아티에를 애첩으로 삼는다. 디안 드 푸아티에는 카트린의 6촌 언니이기도 했다. 그들의 연인관계는 그 후에도 계속 이어져 카트린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녀는 결혼 초기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 왕실 행사 때마다 남편의 정부인 디안의 뒤를 시녀처럼 따라다녀야만 했다. 앙리 2세의 국왕 취임식 때도 남편의 옆자리는 왕비 카트린이 아니라 정부 디안의 차지였다. 게다가 결혼 후 10년 동안이나 2세를 출산하지 못하자 여론이 나빠져 카트린의 폐위 문제까지 거론되었다. 그렇게 힘들고 외로운 세월을 그녀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고 또 읽으며 견뎌내었다. 군주론을 통해 얻은 지혜는 훗날 그녀가 끝없는 종교전쟁과 정쟁 속에서 꿋꿋이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 후 10명의 자식을 내리 낳았고 앙리 2세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모후로서 섭정을 맡은 카트린은 자식들을 잇달아 왕위에 앉혔다.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가 바로 그들이다. 카트린은 남편이 죽은 후 그를 애도하는 의미로 자신이 70세에 사망할 때까지 검은 상복만 입고 지냈다. 그로 인해 그녀는 ‘검은 왕비’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던 프랑수아 2세는 즉위한 지 1년여 만에 요절한다. 곧바로 차남 샤를 9세가 10살에 등극하고 이때부터 카트린의 본격적인 섭정이 시작된다.

카트린 드 메디치 초상화(출처=헝가리 부다페스트 파인아트뮤지엄)
카트린 데 메디치 초상화(출처=월터스 아트 뮤지엄)
◇무용과 향수, 하이힐을 프랑스에 소개하다


카트린은 자식들의 왕권 확립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는 카톨릭 진영과 위그노(개신교) 진영 사이에 끝없는 내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1562년 샤를 9세 치하에서 위그노 전쟁이 발발하자 카트린은 양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해 각 진영의 대표적인 집안을 정략결혼으로 연결하기로 하였다. 가톨릭 계통에서는 자신의 딸이자 샤를 9세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가, 위그노 쪽에서는 호아나 3세의 아들인 헨리케 3세가 선택되었다. 결혼식이 거행된 직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사건이 터지면서 내전은 더욱 심화되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사건은 1572년 8월 24일부터 10월 사이에, 가톨릭교도들이 위그노들을 대량 살해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전국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위그노들이 죽임을 당했고, 호아나 3세도 병사인지 계획된 살해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 배후에 카트린이 있다는 풍문이 돌면서 ‘학살자’라는 악명을 얻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프랑스인들에게 편견과 증오의 대상이었으며, 악인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렇게 된 연유는 자신이 저지른 일 탓도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그녀가 피렌체에서 시집온 외국인이며, 메디치 가문의 자손으로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출신성분에 대한 편견도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카트린에게 권력의 화신이자 악녀라는 면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치야 자식들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서 부득이 관여했겠지만, 사실 그녀는 프랑스에 피렌체의 찬란한 문화를 이식한 주인공으로 더욱 빛난다. 카트린이 프랑스의 문화예술사에 이바지한 업적은 참으로 방대하다. 카트린은 앙리와 결혼하면서 피렌체의 무용을 프랑스로 유입하였다. 그녀가 데리고 간 무용 교사들이 프랑스인 무용수들을 훈련하고, 연출 기법을 가르쳐 궁정 발레의 탄생에 크게 공헌하였다. 카트린의 지휘하에 제작되어 1581년에 무대에 올려진 ‘왕비의 희극발레’는 역사상 최초의 발레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그 외에도 카트린은 프랑스 향수 산업의 창시자로 불리기도 한다. 그녀는 시집갈 때 메디치 가문의 전속 조향사 레나토 비앙코를 데리고 가서 파리에 최초의 향수 상점을 열게 했다. 그 점포는 파리 사교계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향수 산업의 발전을 견인했다. 또한 그녀는 결혼식장에 하이힐을 신고 등장해 화제가 되었고, 그것이 유럽 전역에 유행하면서 하이힐 문화의 선구자로 명성을 떨치기도 한다.

쉬농소 성(제공=프랑스관광청, 사진=티에리 칸탈루포, ThierryCantalupo)
◇포크와 식사 냅킨 도입, 프랑스 음식문화 정립


카트린이 프랑스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음식문화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피렌체의 식사예절을 프랑스 왕실과 귀족 사회에 심었고 풍성한 음식문화도 소개했다. 프랑스인들은 14세기까지 식기를 사용할 줄 몰랐고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다. 그런데 카트린이 시집오면서 식탁 문화가 혁명적인 발전을 한 것이다. 그녀가 가지고 온 포크와 냅킨을 사용하게 되었고, 테이블 매너도 배우게 되었다. 카트린은 르네상스시대의 저술가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의 저서 ‘진정한 쾌락과 건강에 대하여’에 기술된 “식사 전에는 깨끗이 손을 씻고, 냅킨으로 코를 풀지 말 것” 등의 식사예절을 시범보이고 가르쳤다. 위생관념을 깨우쳐 준 것이다. 그녀는 식탁 에티켓을 변화시켰으며, 메뉴를 인쇄하고 식사에 등장하는 요리 순서를 미리 정하는 관습도 만들었다. 정찬의 형태를 갖추게 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카트린이 대동하고 간 요리사들은 다양한 요리법과 향신료도 전수했다.

그때만 해도 프랑스의 요리는 야채는 거의 없고 고기종류만 많았다. 카트린의 요리사들은 프랑스인들이 처음 보는 음식을 소개하였다. 그들은 당시 피렌체나 페라라에서 유행하던 양배추로 조리한 음식과 샤프란을 첨가한 시칠리아풍 마카로니도 식탁에 올렸다. 카트린이 좋아하는 아티초크와 호박, 버섯, 시금치를 이용해 만든 파이, 다양한 생선 요리도 전수하였다. 또한 그들은 소르베와 마카롱, 사바용, 타르트 같은 디저트도 전해주었는데 그 황홀한 맛은 프랑스 왕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러한 영향은 프랑스의 궁정요리가 최고급 코스요리 즉, 오트 퀴진으로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다.

카트린은 무용, 건축, 미술뿐 아니라 요리, 식탁예절, 향수, 하이힐까지 프랑스에 소개했다. 14세의 어린 소녀가 낯선 외국으로 시집가서 해낸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대단한 업적이다. 만약 그녀가 프랑스로 출가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프랑스음식과 이탈리아음식은 각각 어떤 모습으로 남았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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