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세계시민] 엄마나라 말을 못하는 다문화 자녀

  • 등록 2024-02-19 오전 9:46:49

    수정 2024-02-19 오전 9:46:49

[언론인·이데일리 다문화동포팀 자문위원]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는 그를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그의 언어를 써야 합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말이다.

파푸아뉴기니에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적대적인 부족 간에 아이들을 교환하는 풍습이 있다. 어린이들은 다른 부족의 언어를 배우며 자란 뒤 통역가 겸 외교사절로 활약하게 된다. 이 관례가 생긴 뒤로는 사소한 오해로 빚어진 충돌이 훨씬 줄어들고 이해 다툼 조정도 수월해졌다고 한다.

아시안허브의 도움으로 언어 교습법을 익힌 결혼이주여성이 모국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사진=아시안허브)
오는 21일은 ‘국제 모어(母語)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이다. 1952년 동파키스탄(1971년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에서 벵골어 수호 투쟁이 일어난 날을 기려 1999년 유네스코가 제정했다. 언어 정보 제공 웹사이트 에스놀로그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쓰이는 언어는 7168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42.5%인 3045개가 소멸 위기에 놓여 있다.

언어가 소멸하면 그 언어를 써온 집단이나 부족이 수천 년간 축적한 경험과 지혜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 파푸아뉴기니의 몇몇 부족은 어떤 나무의 잎을 쓰임새에 따라 12가지 이상으로 다르게 부르고, 북극권에 사는 이누이트(에스키모)족은 눈을 가리키는 말이 20가지나 된다.

한 나라의 고유한 정서는 모국어로만 온전히 표현할 수 있고 민족 정체성도 해당 민족의 언어로 전승된다. 일제강점기 선조들이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우리 글과 말을 지키려고 한 까닭은 언어를 빼앗기면 민족 고유성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재외동포 2세의 한국어가 서툴면 “자식 교육 잘못 시켰다”고 혀를 끌끌 차고, 외국인 남성과 결혼해 이민한 한국 여성이 자녀에게 한국어를 쓰도록 훈육했다면 손가락을 치켜든다.

동남아시아나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결혼이주여성들은 자녀에게 모국어를 가르치기 쉽지 않다. 생업이나 집안일에 바쁘고, 모국어 동화책이나 교재를 구하기 어려운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남편과 시부모가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엄마나라 말을 배우면 한국어 습득이 다른 아이보다 뒤떨어질까 우려해서다. 심지어 결혼이주여성이 자녀에게 모국어로 말하지 못하도록 하는 가정도 있다고 한다.

엄마나라의 문화와 전통과 관습은 엄마나라 말로만 자녀에게 온전히 전승할 수 있다. 다문화 자녀들이 외교, 무역, 관광,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부모 출신국 간 가교 구실을 하는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려면 어릴 적부터 양국의 언어와 함께 정서와 가치관도 배워야 한다.

전문가들은 다언어 교육(Multilingual Education)이 어린이들의 인지 능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엄마와 자식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은 자녀의 성장 발달과 정서 함양에는 물론 가정의 화목과 엄마의 심리 안정 등에도 필수적이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공공기관, 아시안허브와 한국·아시아우호재단 등 시민단체, 지방차지단체 등이 동남아 교사를 초청하고 엄마나라 동화를 제작해 보급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수요에 턱없이 못 미치는 형편이다.

모국어를 할 줄 아는 것과 가르치는 능력은 별개다. 현실적으로 원어민 교사 배치가 어려운 만큼 인터넷 강의 교재를 보급하는 한편 결혼이주여성에게 언어 교습법을 지도해야 한다.

지금까지 결혼이주여성이나 중도입국 청소년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데 주력했다면 이제는 다문화 자녀들이 엄마나라 말을 배울 수 있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모어가 지닌 가치를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이고 진정한 글로벌 국가로 가는 길이다.
충남 홍성군 가족센터가 다문화가정에서 ‘부모·자녀 상호작용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사진=여성가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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