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현지에서 월가의 핫한 시선을 전해 드립니다. 월가브리핑이 시장의 흐름을 이해하고 투자의 맥을 짚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뉴욕=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평가의 대상일까요, 아니면 분석의 대상일까요.
‘연준에 맞서지 말라’는 격언만 들어도 감을 잡을 수 있겠지요. 월가 인사들 대다수는 후자 쪽인 듯합니다. 통화정책을 하는 건 결국 사람이니 실수가 왜 없겠냐마는, 시장은 그걸 두고 평가의 잣대를 들이밀기보다 이게 무슨 의도일까 분석에 골몰합니다. 연준 행보에 따라 미국은 물론이고 전세계 자산시장이 들썩이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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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월 저격한 WSJ…“자리 물러나야”
그럼에도 최근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행보는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더러 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사설을 보면 월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7월 연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가 있던 바로 그날입니다.
WSJ는 “올해 연준의 가장 큰 실수는 소비자물가 급등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연준은 지난해 12월 당시 올해 개인소비지출(PCE) 인플레이션 전망치를 1.8%로 제시했는데요. 올해 3월과 6월 각각 2.4%, 3.4%로 다시 큰 폭 올렸습니다. 그런데 최근 나온 6월 PCE 인플레이션 수치는 4.0%에 달했습니다. 또다른 물가 지표인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5.4%까지 치솟았습니다. 매 3개월마다 하는 경제 전망이 일치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너무 차이가 큰 것도 신뢰성 측면에서 문제입니다.
WSJ는 “파월 의장은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이라는 자신의 언급이 맞다고 한다”면서도 “소비자들은 다르게 느낀다”고 지적했습니다. 최근 파월 의장은 양대 책무인 물가 안정과 고용 안정 가운데 물가는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뉘앙스를 띠고 있는데, 이를 정면으로 비판한 겁니다. WSJ는 그러면서 “(정부 재정 지출 등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새로운 부채는 정치적으로 연준의 테이퍼링(채권 매입 축소)을 더 어렵게 한다”고 했고요. 심지어 “파월 의장이 통화정책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물가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이 (물가 관리를) 맡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며 내년 2월 연임 이슈까지 거론했습니다.
블룸버그는 최근 오피니언을 통해 “연준은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 매입을 멈출 필요가 있다”면서도 “그러나 연준은 질서있는 테이퍼링의 기회를 놓쳤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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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더미처럼 불어난 부채, 연준 발 묶어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등한시하는 건 예고돼 있었습니다. 지난해 초유의 평균물가목표제(AIT)를 도입하면서 입니다. 기자는 연준을 분석의 대상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AIT만큼은 그동안 [김정남의 월가브리핑] 등을 통해 비판적으로 보도해 왔습니다.
이유가 있는데요. 이번에도 간단히 다뤄봅니다.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한계(marginal)’입니다. 쉽게 말해 현재를 기준으로 최소 단위가 하나씩 추가된 정도를 뜻하는 건데요. 상품을 하나 더 사거나 혹은 하나 더 생산할 때의 효용과 비용을 추정할 수 있다면, 미래의 경제 상황을 가늠할 수 있겠지요. 그 함의는 간단합니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관점에서 미래를 보자는 겁니다. 기대인플레이션을 관리하는 통화정책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AIT는 ‘평균(average)’의 개념을 사용한 겁니다. 과거까지 끌어다가 정책을 하겠다는 건 정확한 기대인플레이션 측정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결론이 가능합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 나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파월 의장은 AIT의 기준이 되는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7월 FOMC를 비롯한 여러 행사에서 파월 의장은 관련 질문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명확하게 답하지 않았습니다. (기자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월가의 한 인사는 “AIT로 인해 5%가 넘는 물가 상승률까지 납득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토로했습니다. 연준 목표치는 연 2%입니다. 또다른 채권 어드바이저는 “AIT는 통화정책은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는 기존 상식을 깬 것”이라며 “예측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현실적인 문제 역시 있습니다. WSJ가 지적한 천문학적인 부채입니다. 월가에서는 요즘 과거와 같은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은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연준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2015년 12월부터 기준금리를 올려 2018년 12월 2.25~2.50%까지 아홉 차례 인상했습니다. 그 즈음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장중 최고 3.3%에 육박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미국 상원의 여야 초당파 의원들은 전날 5500억달러(약 633조원)의 인프라 예산 처리의 가닥을 잡았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역점 추진하고 있는 4조달러 규모의 인프라 투자안의 일부입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추가경정예산의 규모가 이 정도입니다. 말그대로 천문학적인데요. 이런 상황에서 연준이 2015~2018년 같은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 정도 부채 덩어리에 따른 이자 규모가 커지면, 기껏 살려놓은 미국 경제가 다시 고꾸라질 수 있습니다. 연준은 기준금리 인상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횟수를 이전보다 낮추는 식으로 미세조정에 나설 가능성이 큰 게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역대급’ 인플레이션이 온다고 해도, 큰 고려 대상이 아닐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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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직 월가 거물들, QE 만성화 우려
‘원조 닥터둠’ 마크 파버 ‘더 글룸 블룸 앤드 둠’ 발행인은 “나는 QE가 처음 시작된 12년 전부터 QE 영구화(QE infinity)를 주장했고, 실제 그렇게 되고 있다”며 “역사적으로 보면 팽창의 시기에 잠깐 행복할 수 있지만 그 끝은 재앙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또 “지금의 경제 위기는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큰 정부’가 만들어내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월가 굴지의 자산운용사 유로퍼시픽캐피털을 이끄는 피터 시프 회장은 “안타깝게도 연준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돈을 더 푸는 것”이라며 “추가로 국채를 사기 위해 추가로 많은 돈을 찍어야 한다”고 했고, UBS 수석경제고문으로 일했던 2006~2007년 당시 ‘민스키 모먼트(Minsky Moment·부채 확대에 기댄 경기 호황 후 채무자의 상환 능력이 나빠져 건전한 자산까지 팔면서 금융시스템이 붕괴하는 시점)’를 경고해 유명세를 탔던 조지 매그너스 옥스퍼드대 교수는 “지금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물가 상승은 이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손 쓰기 어려운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을 경고한 겁니다.
이던 해리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글로벌경제연구소장은 이데일리에 “(구인은 몰리는데 일할 사람은 부족한) 수요와 공급 간 불일치 때문에 특정 분야는 임금 상승이 강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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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퍼링 운 띄웠지만…정책 ‘딜레마’
최근 연준 행보를 보면 이런 고민들이 뚜렷하게 읽힙니다. 연준은 지난달 FOMC 성명서를 통해 테이퍼링의 운을 띄웠습니다. 이와 동시에 ‘스탠딩 레포(Standing Repo Facility·SRF)’를 도입한다고 발표했습니다. SRF는 은행이 국채, 정부기관채 등을 담보로 맡기고 차입을 할 수 있는 창구를 상시화하는 유동성 대출 제도인데요. 긴축에 대비하기 위한 장치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목할 건 성명서 직후 파월 의장의 기자회견이었는데요. 그는 기자회견 내내 톤 조절에 나서며 ‘신중한 긴축’을 암시했습니다. 테이퍼링을 어떻게든 시작해서 꾸역꾸역 이어갈 생각이 있지만, 기준금리 인상은 아직 한참 멀었다는 인상을 풍기려 애쓰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뉴욕 월가와 워싱턴 정가 분위기를 보면, 이것 외에는 딱히 선택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시프 회장은 “(지금 재정·통화 상황을 보면) 물가는 갈수록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며 “연준이 틀렸다고 인정할 때 즈음이면 많은 부채에 시달릴 것”이라고 경고했고요. 그는 또 “연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말했습니다. 매그너스 교수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때 지금처럼 정부 부채가 높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굉장히 특이하다”고 했습니다.
WSJ는 “미국 경제를 분석하는 수백명의 이코노미스트를 둔 연준이 경제 전망을 자주 틀리는 건 놀라운 일”이라고 일갈했지만, 지금 경제 상황은 전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경제정책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지요. 투자자 스스로 역사상 불확실성이 가장 높은 때라는 전제를 세워둔 후 시장에 대응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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