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를 지키는 ‘동물적 모성’…봉준호 감독의 ‘마더’

  • 등록 2009-05-22 오후 12:05:00

    수정 2009-05-22 오후 12:05:00

[경향닷컴 제공] 인간에게 최초이자 최후의 관계, 그래서 법이나 윤리를 넘어선 관계, 인간이기보다는 때론 동물 같고 가끔 신성한 관계. 엄마와 자식 관계다.

제6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먼저 공개된 봉준호 감독의 신작 <마더>가 20일 한국에서 시사회를 열었다. 제목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어머니’인 <마더>는 45년이 넘는 김혜자의 연기 인생에서 단 세번째 영화다. 영화 속 김혜자는 별다른 이름 없이 ‘엄마’ ‘엄니’ ‘어머니’로만 불린다. 엔딩 크레디트에 김혜자의 배역은 ‘마더’라고 써있다.

갈대가 우거지고 인적이 없는 가을 들판, 멀리서 엄마가 다가온다. 얼이 빠진 듯, 무념무상인 듯, 해독할 수 없는 표정을 한 엄마는 갑자기 춤을 춘다. 이 장면은 영화 종반부의 결정적인 순간 한 번 더 반복된다. 봉 감독은 김혜자의 기묘한 표정과 춤사위를 도입부에 배치함으로써, 관객에게 ‘<마더>는 배우 김혜자의 육신과 감정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엄마는 읍내의 약재상에서 일하고, 가끔 비합법적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침을 놔준다. 그에겐 모자라 보이는 아들 도준(원빈)이 있다. 엄마는 한 손으론 작두질을 하면서도 길 건너편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불안해하며 눈을 떼지 못한다. 어느날 아들이 경찰에 잡혀간다. 아들이 여고생을 둔기로 살해했으며, 시신을 건물 옥상 난간에 올려두었다는 것이 경찰의 수사 결과다. 좁은 시골 마을이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경찰은 “100% 끝난 사건”이라고 얘기하지만, 엄마는 아들의 무죄를 확신한다. 경찰이 서류를 덮고, 변호사가 무성의한 표정을 짓는 순간 엄마는 홀로 ‘수사’에 착수한다. 아들의 친구 진태(진구)의 도움으로 단서가 하나 둘 드러난다.

영화 초반부는 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킨다. <살인의 추억>을 스스로 패러디한 듯한 장면도 보인다. <살인의 추억>에선 현장 보존이 엉망이었는데, <마더>에선 ‘ 보는 요즘 애들’ 덕에 보존 상태가 완벽하다. 예전 경찰은 자백을 받기 위해 물리력을 썼는데, 요즘 경찰은 말로 꼬드긴다.

관객이 웃을 수 있는 지점은 초반부까지다. <살인의 추억>에선 송강호, 박노식(백광호 역)의 활약에 중반부 이후까지 키득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마더>엔 넉살꾼이 없다. 15㎞ 지점부터 스퍼트를 시작하는 마라토너처럼, 봉 감독은 사건을 풀기 위한 최소한의 단서가 제시되자마자 템포를 늦추지 않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달려버린다. 저러다 쓰러지지 않을까 싶지만, 기우다. 작품의 첫 1분과 마지막 1분까지 이토록 균질한 상태의 상업영화를 만드는 이는 세계에서도 몇 명 안된다. 봉준호는 그 몇 명에 포함된다.

하지만 웃음기 없는 상업영화는 양념 없는 음식과 비슷하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종내 감정을 몰아붙이는 통에, 관람 후엔 스크린에 기운을 빼앗긴 느낌이다. 푹 곤 도가니탕은 몸에 좋지만, 깍두기가 없으면 느끼해서 먹기 힘들다.

거시와 미시가 조화를 이뤘다. 커다란 회색 벽 밑의 조그만 사람을 비쳤다가, 손가락 끝에 적셔지는 찬 물방울을 찍는다. 영화판 사람들은 세부 묘사에 강한 그에게 일찍이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이라는 별명을 붙여두었다. 엄마의 침통까지 따로 디자인했다. 별다른 특수효과, 특급 스타가 없는데도 62억원의 순제작비가 든 이유다. <도쿄!>에서 봉 감독과 작업한 일본 배우 가가와 데루유키는 “봉준호는 커다란 크레인을 운전하는 기사다. 크레인 끝에는 현미경이 달려있다”고 표현한 바 있다.

‘엄마와 아들’은 영화의 주제다. 둘의 관계는 아슬아슬하다. 아들이 성인이면 모자는 떨어져야 하지만, 이들 모자는 여태 제대로 분리되지 않았다. 아들이 길거리에서 오줌을 누는 모습을 엄마는 바로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잠도 나란히 누워 잔다. 둘의 관계가 수상쩍다고 입방아에 올리는 사람도 있다.

영화 속 엄마와 아들은 세상에 둘만 남았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아무도 믿어선 안된다. 핏줄만 챙기는 이 태도는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현대 사회’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김혜자가 <전원일기>에서, 그리고 조미료 광고에서 오랫동안 한국인에게 각인시켰던 ‘푸근한 모성’과도 거리가 멀다. 세상을 향해 눈을 희번덕대며 적의를 드러내는 엄마는 새끼를 밴 암컷에 가깝다. ‘쿨한’ 모성이란 것은 존재할 수 있을까. 김혜자는 극적이며 때론 과장된 제스처로 이 원형적 모성을 드러낸다. 영화 종반부, 엄마는 엄마 없는 또다른 아이를 보며 서럽게 울어대지만, 영화 속에서 엄마가 타인을 생각하는 건 이때가 전부다. ‘새끼’를 욕 아닌 말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엄마고, 엄마는 원래 제 새끼밖에 모른다는 것이 <마더>의 전언이다. 28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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