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연휴가 끝나고 출근한 지 1주일이 지나서야 명절 선물이 도착한 적이 있습니다. 어디를 그리 돌아다니다 온 것인지 상자 모서리 부분이 닳아 있었습니다. 우두커니 놓여있는 상자를 보자 두 가지 감정이 스쳤습니다. 명절 연휴를 앞두었던 당시의 들뜬 기분이 되살아났다가, 연휴는 이미 끝났다는 뼈저린 자각이 뒤를 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카드든, 명절 선물이든 우편물이 폭주하는 계절엔 서둘러 보내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이번주 개봉한 <쇼퍼홀릭>은 한발 늦게 도착한 카드, 혹은 명절 선물 같은 영화입니다.
영화의 원작은 <쇼핑중독자의 고백>이라는 시리즈 소설입니다. 한국에서는 <쇼퍼홀릭>이란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뉴욕의 별볼일없는 잡지사 기자 레베카는 중증의 쇼핑중독자입니다. 멋진 남자보다 ‘신상 구두’가 눈에 띄고, 원하는 물건은 거짓말로 돈을 빌려서라도 손에 넣습니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잡지사가 문을 닫자, 신용카드 고지서는 레베카를 습격할 태세를 갖춥니다. 이참에 레베카는 평소 꿈꾸던 패션 잡지사 취직을 노리지만, 얼떨결에 같은 그룹 계열사인 재테크 잡지에 고용됩니다. 하지만 레베카는 경제엔 일자무식. 편집장 루크의 닦달을 받으며 고전하던 레베카는 자신의 쇼핑 경험을 녹인 알기 쉬운 재테크 기사로 주목을 받습니다. 직업적 성취에 루크와의 로맨스는 덤처럼 따라옵니다.
하지만 영화 <쇼퍼홀릭>은 2009년 선보입니다. 2007년과 2008년은 연속적이지만, 2008년과 2009년은 불연속적입니다. 지난해 가을 맨해튼을 진원으로 하는 전 지구적 금융위기가 크레바스처럼 그 사이를 갈랐습니다. 최근 미국에 있는 한 친구와 메신저 서비스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이 망할 줄 누가 알았겠니”라고 말하더군요. 한국인은 이미 97년 외환위기로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에겐 그런 경험이 없을 겁니다. ‘모든 나라는 망한다’는 명제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만큼 명백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잊은 채 매일 새 아침을 맞았습니다.
<쇼퍼홀릭> 속의 천하태평하고 사랑스러운 여자 레베카를 보세요. 지난달에 산 물건이 질릴 틈도 없이 새 물건이 쏟아지는 풍요로운 자본주의의 중심에서, 레베카는 ‘마법의 신용카드’로 빚을 늘려 나갑니다. 걱정할 건 없습니다. 다른 카드로 돌려막으면 되니까요.
▶ 관련기사 ◀
☞과감 노출과 불륜 ''블랙 아이스'', 핀란드 영화라 더 눈길
☞[SPN리뷰]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의 실체...''실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