宮에 허튼 나무 한그루 있으랴

송혜진 기자의 나무기행
왕(王)의 눈에 든 나무 보러 가자…경복궁 나무산책
  • 등록 2008-11-20 오전 11:16:00

    수정 2008-11-20 오전 11:16:00

[조선일보 제공]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몸을 묻은 여인들과 나무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왕의 '간택(揀擇)'을 받기 위해 치열한 역사를 살아왔다는 것이다. 왕의 눈에 들기 위해 어떤 나무는 돈벼락을 뿌렸고, 어떤 나무는 달콤한 과실을 생산했으며, 어떤 나무는 벼락을 막아서기도 했다. 궁궐의 삶이란 역시 겉보기에만 우아할 뿐, 한 겹 들추고 보면 치열하고 농밀한 것.

부쩍 야윈 바람이 부는 오후, 서울 경복궁(景福宮)에서 그림자를 늘어뜨린 나무들에게 왕의 사랑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물었다. 이들의 대답은 나무연구가 윤주복씨가 대신 들려줬다.

▲ 경복궁 자경전(慈慶殿)의 꽃담장 위로 살구나무 그림자가 어룽댄다. 예로부터 씨앗의 효능 덕에 만병통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살구나무. 꽃담장으로 길게 팔을 뻗은 그림자가 변함 없이 왕족의 '무병(無病)'을 지키려는 몸짓처럼 보인다.

"궁(宮)은 예전부터 오래오래 자라온 나무와 새로 심은 나무들이 섞여 있는 곳이죠. 옛 궁궐 사람들은 용도에 따라 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모든 나무엔 제 나름대로의 뜻과 사연이 있습니다. 궁궐 나무 산책은 그래서 재미있죠." 윤주복씨의 설명이 오늘따라 노랫가락처럼 들린다. 갓 헹궈 널은 빨래처럼 늦가을 하늘은 차갑고 청명하다.

경복궁 뜰의 나무들을 보기 위해 택한 길은 광화문에서 홍례문을 지나 근정전에 닿기 전 용문루로 몸을 틀어 자선당과 자경전을 지나치는 순서. 향원정을 한 바퀴 돌고 건청궁 앞을 지나쳐 나온다. 평일엔 사람이 거의 없는 조용한 길. 찬찬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웬만한 나무들을 둘러보고 나올 수 있다.

▲ 자선당 입구에서 바라본 소나무밭
이야기의 시작은 미선(尾扇)나무였다. 키가 작은 걸 보아하니 근래 들어 가치를 인정받고 궁에 발을 디딘 나무일 게다. 사연은 이랬다.

"미선나무는 1속1종이에요.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세계에서도 우리나라밖에 없는 특산나무로, 미선나무속(屬)에 미선나무만 있다는 거죠. 충북 진천, 괴산, 영동, 전북 내변산에서 자라는데 네 곳의 나무 모두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어요."

한마디로 우리 나라 외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외모 덕에 '튀어서 뽑힌' 나무다. 개나리처럼 생겼으나, 하얀색 꽃이 달린다. 외모만큼 '성격'도 튀는 걸까. 다른 놈들이 그렇듯 봄에 꽃이 피는 나무지만, 경복궁의 미선나무는 시절도 잊은 채 꽃송이를 잔뜩 매달고 있었다. 물론 4월 꽃송이처럼 탐스럽진 않다. 밥풀처럼 작고 빈약했다.

철을 잊고 핀 꽃송이도 재미있지만, 열매는 더 볼만하다. 갈색으로 익은 동글납작한 열매는 꼭 시녀들이 용왕 곁에 나란히 서서 흔드는 커다란 부채(미선·尾扇)를 닮았다. 그래서 이름도 '미선'이다. 윤주복씨는 "봄에 꽃이 피면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고 했다.

미선나무 주변엔 앵두나무가 지천이었다. 이 나무들도 역시 이유 없이 우르르 궁궐 담 안으로 들어오진 못했을 것이다. "맞습니다. 앵두는 세종대왕께서 그렇게 좋아하셨답니다. 옛 기록을 보면 맏아들 문종이 후원에 앵두를 따로 심었다가 익은 열매를 손수 따서 세종에게 갖다 드렸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앵두나무가 많은 건 그 덕분이겠죠."

열매도 꽃도 죄다 떨어져 가지만 앙상한데도, 뜰을 한 가득 메운 자태가 제법 늠름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계속되는 궁궐 나무들의 '간택사(揀擇史)'를 듣기 위해 우리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 1.쉬나무 열매. 가운데 씨앗 은 빠져서 보이지 않는다. 2.회화나무 열매 3.주엽나무

■ 저 나무를 심으면 왕자가 공부를 할까… 회화나무

2층 규모의 정자 향원정(香遠亭)이 있는 연못 향원지(香遠池) 양 옆엔 아직까지 푸른 잎새를 자랑하는 나무 두 그루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선비의 기개'를 상징한다는 회화나무다.

윤주복씨는 "학자수라는 별명 덕에 더 유명해졌다"고 했다. 학자수(學者樹)란 이름은 중국 주나라 때 삼공(三公) 덕에 얻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삼정승에 해당하는 이들 삼공은 조정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각각 그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서로 마주 보면서 정사를 돌봤다고 한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에서도 회화나무는 출세한 사람의 상징이 됐고, 궁궐은 물론 양반 집안 곳곳에서 두 팔 벌려 회화나무를 맞아들였다는 것.

"전교 1등 하는 학생 책상에 앉아보려는 심리랑 비슷한 거네요."

"하하, 그렇죠. 임금님이라고 자식들 공부 잘하길 바라지 않았겠습니까. 왕자들이 삼공처럼 학문에 정진해 정치를 잘하고 출세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회화나무를 심게 했을 겁니다." 

▲ 비술나무


■ 돈벼락이 떨어질까… 비술나무

비현각 근처엔 비술나무가 있다. 평범하게 생긴 큰키나무, 대단한 사연이 있어 뵈진 않았다.

"얘기가 조금 복잡해요.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문제랄까…."

윤주복씨가 차근차근 풀어놓은 설명은 이렇다. 어떤 기록에 보면 '느릅나무 열매 모양이 동전을 닮아서 동전을 유전(楡錢) 또는 유협전(楡萊錢)이라고 불렀다'라고 돼 있단다.

한편에선 그 반대로 '느릅나무 열매가 동전을 닮아서, 느릅나무의 열매를 두고 유전·유협전이라고 불렀다'라는 설도 있다. "동전을 보고 열매 이름을 붙였나, 열매를 보고 동전 이름을 붙였나…의 문제인 거죠."

어찌됐건 이쯤 됐으면 결론은 '느릅나무 열매와 동전은 닮았다'가 돼야 한다. 한데 윤주복씨는 늘 이 점이 석연치가 않았다고 했다. "느릅나무 열매는 동전처럼 둥글지가 않아요. 타원형, 또는 달걀형이죠. 억지로 비슷하다고 우길 순 있겠지만 늘 딱 떨어지진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비술나무를 본 겁니다."

비술나무는 느릅나무과 느릅나무속의 나무. 한데 비술나무의 열매는 그야말로 동전과 똑같이 생겼다. "열매가 거의 둥글고 씨는 열매 한 가운데에 위치합니다. 열매는 5월에 익는데, 바람이 불면 그야말로 우수수… 떨어져요. 그걸 보고 있으면, '세상에, 돈 떨어진다!'는 탄성이 절로 나오죠. 옛날 사람들은 흔히 비술나무와 느릅나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느릅나무라고 부르는 일도 많았거든요. 그런 점들을 볼 때, 사람들이 이 비술나무 열매를 두고 '유협전'이라 불렀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5월이면 돈 떨어지는 듯 열매가 우수수 쏟아지는 비술나무. 궁궐에 비술나무를 심은 것도 나라의 재화가 늘 풍요롭길 바라는 마음 때문 아니었을까. 바람이 불자 비술나무가 가지를 흔들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5월이 아니었다. 
 
▲ 1.열매를 끝까지 달고 있는 은행나무 암그루. 2.빼빼로처럼 생긴 개오동 열매. 3.향원정을 바라보고 선 회화나무

■ 벼락 막는 개오동, 등유로 쓰는 쉬나무

"빼빼로 나무 보셨어요?" "빼빼로 나무요?"

반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국립민속박물관 입구 야생화 자연학습장 담장 쪽에 자라는 나무 한 그루가 눈앞에 들어왔다. "아, 저 나무 말씀하셨던 거군요!"

개오동나무. 참말로 빼빼하게 생긴 과자 모양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다. 땅에 떨어진 열매를 주워들었다. 길이 20㎝가 넘는 길쭉하고 날씬한 모양. 일부 지방에선 이 기다란 열매가 노끈처럼 생겼다고 '노끈나무', '노나무'라고도 불렀단다.

개오동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오동나무보다 쓸모가 못 미친다는 뜻. 한데 꼭 그렇게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무가 워낙 빨리 자라는 데다 습기에 견디는 힘이 강해서 나막신 만드는 데도 자주 썼고요, 게다가 뜰에 심어두면 벼락을 피한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궁궐에선 그럼 그 속설 때문에 심었을까요?" "그랬을 가능성이 높죠. 궁궐에 벼락이 치면 큰일나잖아요."

몸 바쳐 충성한 덕분에 '입궐'에 성공한 개오동을 북한에선 향오동이라고 부른다. 꽃이나 잎에서 좋은 향기가 나기 때문이라고. 이래저래 개오동이라 불리기엔 많이 억울하겠다.

개오동 바로 곁엔 쉬나무가 있다. 원래는 '수유나무'라고 부르던 것이 '쉬나무'가 됐다.

쉬나무는 열매 덕에 출세했다. 가을이면 열매가 갈라지면서 알알이 들어찬 새까만 씨앗을 내보인다. 이 씨앗에서 짠 기름으로 등잔불을 밝혔다.

"양반 집에서 필요한 나무였죠. 공부하는 데 꼭 필요한 게 등잔불이었으니까요. 궁궐에서도 마찬가지였겠죠. 이래저래 밤에 더 궁리하고 논의할 게 많은 곳이 궁궐 아니었겠습니까."

■ 귀신을 쫓아라… 주엽나무, 질기다 질겨… 은행 암그루

자미당 터를 지나 향원정으로 건너가는 길, 갈색 바나나처럼 생긴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주엽나무가 보인다. 윤주복씨는 "저 나무가 아주 독한 녀석"이라고 했다.

'독하다'고 불린 건 가시 때문이다. 주엽나무의 줄기엔 크고 두꺼운 가시가 나는데, 이때 가시 위에 또 다른 가시가 돋아나는 것이 보통이다. 옛날 사람들은 저 가시 때문에 귀신이 함부로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주엽나무는 일종의 '부적'으로 구중궁궐 한복판에 뿌리 내린 셈이다.

주엽나무 바로 위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윤주복씨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저 녀석은 보나마나 암그루겠네…." "어떻게 아세요?" "다른 은행나무와 한번 비교해 보세요."

주위의 다른 은행나무들은 하나 같이 이미 잎을 떨구고 가지만 남은 상태. 한데 이 은행나무는 누렇게 뜬 은행잎과 은행 열매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아직까지 꽉 붙들고 있다. "보통 암그루가 수그루보다 잎도 열매도 더 오래 붙들고 있어요.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은행나무의 대부분이 모두 암그루고요."

대추나무는 다산의 상징. 그래서 궁궐에 심었다 한다. 은행나무 암그루도 역시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로 궁궐에 들어왔을 수 있겠지만, 궁궐의 여인네들은 저 끈질긴 은행나무 암그루를 보면서 남다른 생각을 했을 것도 같았다. 그들의 속사정까진 알 순 없지만, 어찌됐건 은행나무 암그루의 위용엔 한 치의 부끄럼도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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