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에서 만났다 영롱한 일몰

영광군 백수해안일주도로 ''해따라기'' 여행
"부세도 맛있던데요…" "뭔 소리 괴기는 굴비랑게"
세찬 바람 맞아 노랗게 마른 굴비… 부세, 현지에선 찬밥이지만 맛있어
  • 등록 2009-05-21 오전 11:39:00

    수정 2009-05-21 오전 11:39:00

[조선일보 제공]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하도 근사해서 물리적 법칙 따위는 잊고 싶을 때가 있다. 늦은 봄 해질 무렵 전남 영광군 백수해안일주도로 옆 백암전망대에 섰을 때가 그랬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둥근 불덩이가 천천히 수평선에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구가 돈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이 지어낸 농담처럼 느껴졌다. 하얗게 빨갛게 노랗게 빛깔을 바꿔가는 태양은 바다 아래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듯 보였다.

'신령한 빛'(靈光)이라는 군 이름처럼 영광의 일몰은 비현실적으로 찬란했다. 원불교 영산성지(전남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 2)부터 77번 국도 따라 백암해안전망대까지 이르는 17㎞짜리 백수해안일주도로가 '영광 해넘이'의 주무대다. '백수'(白岫)를 흔히 '흰 봉우리'라고 여기기 십상이지만 영광군청 문화관광과 임동환 계장은 "백수읍에 있는 구수산 봉우리가 99개라는 뜻"이라고 했다. 백수(白壽)의 경우처럼, 99를 뜻하는 말이다. "일백 백(百)자에서 하나(一) 빼면 아흔아홉 아닙니까." 

▲ '신령한 빛의 도시' 영광의 일몰은 평화롭다기보다 역동적이다. 백수해안일주도로 백수서초등학교와 천일염전 사이 보리밭.
▲ 해 넘어가는 영광 서쪽을 잇는 백수해안일주도로. 

 
동쪽엔 산이, 서쪽엔 바다가 이어지는 이 도로는 해안선이 길고 부근에 큰 섬이 없어 바다 일몰을 감상하기 제격이다. 영광 사람들은 백수해안도로를 북동부에서 남서쪽을 향해 달려야 해 넘어가는 풍경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고 말한다.

77번 국도는 '공식적인' 백수해안도로가 끝난후에도 바다를 끼고 이어지다가 연둣빛으로 출렁이는 찹쌀보리밭과 거울처럼 반짝이는 염전을 지나 다시 바다 옆으로 향하길 반복했다. 바다도 보리밭도 염전도,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일몰 시각' 약 한 시간 전부터 해 잡아먹기 축제를 벌이는 듯 뜨거운 붉은빛으로 아우성이다. 해는 못 이기는 척 꾸물꾸물 움직이다가 수평선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다음부턴 뒤늦게 뭔가 생각난 것처럼 서둘러 모습을 감췄다.

영광 '해따라기' 여행의 재미는 해안도로에서 그치지 않는다. "다른 고장엔 보통 팔경(八景)이 있지요. 영광엔 팔경에 더해 팔괴(八怪)가 전해 내려와요. 개발과 함께 대부분 사라졌는데 염산면 갯벌에 있는 조개 무덤은 아직 남아 있지요. 갯벌서 보는 일몰이 아주 색다르니 물때가 맞으면 들렀다 가세요." 해안도로 가드레일 뒤 일몰로 성이 차지 않는 이들은 신발 벗고 갯벌로 걸어나가 온 몸으로 석양을 만끽한다는 설명이었다.

백수해안도로를 즐긴 다음 날 오후, 두우리 박완진 이장의 안내를 따라 '당두 갯벌체험마을'에서 조개 무덤을 향해 걸었다. 바다를 바라보고 왼편에 소나무로 이뤄진 섬이 있는데 그 방향으로 쭉 걸으면 된다고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갯벌엔 바닷게가 만들어놓은 동그란 구멍과 조개가 자잘하게 이어졌다. 맨발로 20분쯤 걸었을 때쯤, 갯벌에 커다랗고 흰 양탄자를 깐 듯한 조개무덤이 갑자기 모양을 드러냈다. 영광군청 옛 자료는 이 조개무덤에 대해 '굴 껍데기 모둠이 있는데 뱃사람들이나 주민들이 실어내도 잠깐 사이에 다시 쌓여 그 모둠이 이전과 같아진다'고 기록한다.


▲ 조기일까, 부세일까. 영광 법성포 부근 굴비가게에선 조기와 부세가 함께 말라간다. 양식이 안 된다고 한 마리 10만원이 넘기도 하는 굴비(조기 말린 것)와 달리 부세는 양식이 잘 된다고 마리당 5000원 정도에 판다.


박 이장은 "옛날엔 조개 무덤이 초가집만큼 컸고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고 했다. "어느새 규모가 절반이 됐어요. 부근 갯벌 매립 사업으로 물살이 빨라져서 그런가 봅니다. 머지않아 조개들의 무덤도 다른 '팔괴'처럼 사라질지 모르겠네요. 조개 무덤이 오래 남아있을 수 있게, 되도록 올라서지 마시길 부탁합니다." 갯벌에 발 푹 담그고 조개 무덤을 구경하는 사이 따스한 바닷물이 발목을 간질였다. 부서져 겹겹이 쌓인 조개껍데기들이 '나 아직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듯 기우는 햇살을 받아 꼼지락거렸다.

노을로 소문난 전남 영광 백수해안일주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는 길 양옆으로 연둣빛 보리가 바다처럼 출렁이더니 반짝이는 염전으로 바뀌었다. 영광 옛사람들은 제 고장에 흔하디흔한 세 가지를 재료로 '보리굴비'를 만들었다. 조기를 소금에 절여 말리고 보리 담은 항아리 속에 콕 박았다가 짝짝 찢어 고추장에 찍어 밥과 함께 먹었다.

영광 굴비의 지금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저장시설 좋은 배들이 늘면서 조기는 칠산바다까지 오기 전 먼바다에서 먼저 잡힌다. 그러니 수산물 경매장에 들어온 남지나해 산 조기를 사다가 굴비를 만들어야 한다. 냉동 시설 덕분에 조기를 바싹 말릴 필요도 없고, 습도 조절하려고 보리 속에 저장할 까닭도 없어졌다. 굴비는 통통해지고 맛은 좀 심심해졌다. "조기 사다가 바닷가에 걸어 말리기만 하면 어디서건 만들 수 있지 않나요"라고 묻자 영광군 문화관광해설가 오영님씨는 씩 웃었다. "법성포에 일단 가 보자"고 했다. 법성포는 이달 초 굴비산업특구로 지정됐다.

법성포에 가까워지자 굴비 가게와 식당이 하나 둘 늘어가는가 싶더니 곧 수백 개 굴비 전문점이 포구를 둘러쌌다. 가게마다 줄줄이 엮은 조기를 말리는 풍경이 펼쳐졌다. "생선이 이토록 많이 널렸는데 파리가 한 마리도 없으니 어색하지 않나요." 이곳 바닷바람은 파리 꾈 틈도 없이 강하게 분다고 한다. 그 세찬 바람에 말린 굴비가 다른 곳 굴비와 맛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조기가 비교적 많이 널려 있는 '장보고굴비'(061-356-7608)에 들어갔다. 굴비는 음력 3월쯤인 오사리 때 잡은 조기를 말린 '오사리 굴비'를 최고로 친다. 알이 통통하게 차올라 먹을 게 많기 때문이다. 오사리 때 잡은 조기는 보통 추석까지 간단다. 장보고굴비 장동휘 대표는 "비늘이 다 붙어 있고 온몸에 노란빛이 돌아야 좋은 굴비"라고 했다. 


▲ 영광 계마항 뒤로 천천히 지는 해.

▲ 영광 당두 갯벌체험마을 부근 조개 무덤. 영광 8괴(八怪) 중 하나다.

오영님씨는 "서울서 손님이 오면 일번지식당(061-356-2268)으로 모실 때가 많다"고 했다. 값비싼 반찬을 얹어 한 상 가득 나오는 건 좋은데 2인분 '한 상'이 최소 4만5000원으로 가격이 만만치 않다. "영광 분들 굴비 백반 드시러 가는 소박하고 맛있는 식당"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우리는 만나식당이랑 동원식당 가서 먹지요"라고 말했다.

동원식당(061-356-2351)의 1인당 1만5000원짜리 백반엔 사람 수대로 구운 굴비, 커다란 부세 한 마리, 간장게장, 조기 매운탕, 조기젓, 송어젓, 매실 장아찌 등 반찬 약 20가지가 나왔다. 굴비도 굴비지만 물엿 바른 듯 윤기가 자르르한 부세가 젓가락질을 부추겼다. 바싹 말린 부세를 쪄서 손으로 찢어 먹는데 밥 한 숟갈과 함께 넣고 잘근잘근 씹으니 짭조름한 감칠맛이 코로 흥흥 흘러나온다. 조기와 같은 민어과인 부세는 조기에 비해 꼬리 부분에 살이 없고 눈언저리가 약간 작다. 조기를 상징하는 '머리 위 다이아몬드 모양'도 없다. 조기와 달리 양식이 잘 된다. 가격이 그만큼 싸서 돈이 안 되니 영광서 양식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중국산 양식 부세를 들여와 영광서 말려 판다. 영광 사람들은 시큰둥하게 말하는데, 서울 사람 입엔 착착 붙는다.

만나식당(061-356-2377·굴비백반 1만원부터)은 이 지역 사람들 말로 '고리끼한'(곰삭은 맛이 나는) 조기젓이 일품이었다. 바싹 말린 보리굴비를 찢어 고추장에 박아 만든 '고추장 굴비'도 씹을수록 고소했다.

감칠맛이 능청스럽게 배어 나오는 굴비를 잔뜩 먹고 나니, 좀 사가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얼음 팩을 함께 넣어 포장이 꽤 무겁기 때문에 요즘은 대부분 굴비를 사서 택배로 부친다. "굴비는 중간 불에 20분 정도 구우세요. 너무 자주 뒤집으면 부서지니까 딱 한 번만 뒤집는 게 좋아요. 부세는 센 불에 20분 정도 찌세요. 손으로 북북 찢어 상에 올리시고요."

굴비 가격은 한 두름(크기에 따라 열 마리 혹은 스무 마리)에 약 3만원부터 100만원까지 천차만별. 가격은 덩치와 비례한다. 오씨는 "한 두름에 5만원짜리면 반찬으로 먹기에 적당히 통통하고 맛있다"고 했다. 옛날 식으로 바싹 말린 보리굴비도 값은 비슷하다. 3~4개월 정도 말려 파는 부세는 한 두름에 4만~5만원 정도로 고급 굴비보다 훨씬 싸다.

교통::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나들목으로 나간다. 서울 반포동 센트럴시티 터미널에서 하루 20회가량 영광행 버스가 떠난다. 요금은 1만6000원부터. 버스표 예약 www.easyticket.co.kr 영광 터미널에서 법성포 가는 버스는 수시로 출발한다.

문의:: 영광군청 문화관광과 (061)350-5752, 영광굴비 특품사업단 (061)356-5657


잉카 문명을 생생하게… 굴비의 모든 것을 알차게

2009년 '영광 방문의 해'를 맞아 다양한 행사가 이어진다. 영광 스포디움에서 7월 31일까지 열리는 나스카―잉카 문명 테마전은 또 다른 '태양의 도시' 나스카―잉카 문명의 흥망성쇠를 유물, 사진, 영상 등으로 친절하게 설명하는 전시다. 나스카 지상화, 마추픽추, 시판왕 무덤 등 시간 속에 묻힌 나스카―잉카 문명의 흔적을 상세히 소개한다. 세계문화유산을 답사하며 생생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온 김용범 감독이 기획한 전시답게 유물마다 현장의 지금 모습과 김 감독의 설명이 담긴 영상을 곁들여 알아가는 재미가 풍성하다. 문의 (061)352-0047· www.inca2009.com 입장료는 성인 9000원, 초·중·고등학생 4000원으로 약간 비싼 편. 월요일은 쉰다.

▲ '영광 방문의 해'를 맞아 7월 31일까지 영광 스포디움서 열리는 '나스카—잉카 문명 테마전'.

 
5월 27~30일엔 법성포 부근 숲쟁이공원을 중심으로 법성포 단오제·굴비 축제가 열린다. 그네타기, 씨름 등 전통 단오 행사와 아울러 굴비 요리 경연대회, 굴비 시식회 등 굴비를 맛볼 수 있는 행사가 많다. 문의 법성포단오보존회 (061)356-4331· www.dano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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