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뀐 빛·색… 환상의 ‘메이킹 포토’

‘현실을 창조하는 사진’ 새 흐름
  • 등록 2009-02-11 오후 12:00:00

    수정 2009-02-11 오후 12:00:00

[경향닷컴 제공] 작가 고상우씨의 개인전 ‘돈과 조건보다 사랑이 소중하다 믿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가 서울 소격동 선컨템포러리(6~28일)에서 열리고 있다. ‘반전사진’으로 불리는 그의 사진은 좀 독특하다. 연인과 부부를 촬영한 이 사진들은 작가의 말대로 “회화와 오브제, 퍼포먼스가 뒤섞인 총체예술”의 성격이 다분하다. 작가는 모델을 섭외해 이들의 몸에 물감을 칠하고 소품을 배치한 뒤 컬러 네거티브 필름으로 촬영해 네거티브 이미지 그대로 인화한다. 때문에 실제 관객들이 보는 사진은 빛과 어둠이 뒤바뀌고 원래의 색 대신 보색으로 치환되어 환상적인 색감을 자랑한다. 작가는 최종 인화물의 색감을 미리 세심하게 계산해 인물과 배경, 소품에 서너시간 동안 직접 물감을 칠한다.

▲ 작가 이정록씨의 ‘사적 성소’ 시리즈
서울 팔판동 공근혜갤러리에서 13일부터 다음달 15일까지 개인전을 여는 작가 이정록씨의 사진도 퍼포먼스의 요소가 강하다. ‘사적 성소’ 연작은 나무가 서 있는 들판이나 숲을 배경으로 연출한 사진들이다. 생화를 가져다가 숲의 풍경을 새롭게 구성하고 인공 오브제를 설치하거나, 겨울밤 메마른 나뭇가지 주변에 조리개를 열어놓고 플래시를 순차적으로 터트려서 마치 열매가 맺힌 듯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최근 1~2년 사이 한국 사진이 변화하고 있다. “사진 한 번 힘들게 찍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사진과 사진 기술에 대한 정교한 이해를 바탕으로 설치미술, 조각, 퍼포먼스, 회화 등 다양한 미술의 요소를 끌어들여 촬영하는 이른바 ‘메이킹 포토(making photo)’가 대세를 이룬다.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짧게는 서너시간, 길게는 며칠씩 준비를 하고 세심하게 피사체를 연출한다.

▲ 작가 이정록씨의 ‘사적 성소’ 시리즈
대표적 작가인 정연두씨는 정교한 무대 세트와 인공조명을 설치하고 배우를 기용해 현실과 허구를 뒤섞은 ‘로케이션’ 시리즈나 평범한 개인이 꿈꾸는 미래를 가상으로나마 실현시켜주는 ‘내사랑 지니’ 시리즈 등을 선보였다. 또 이문호씨는 지난 연말 덕원갤러리에서 열린 기획전 ‘Sculpture Spoken Here(조각은 공용어)’에서 사진과 조각을 결합시켜 눈길을 끌었다. 고흐가 그린 ‘고흐의 방’을 실물 크기로 직접 제작하고 색을 칠한 뒤 촬영하거나 볼록거울로 본 듯 왜곡된 공간을 만든 뒤 사진으로 제시해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견작가 유현미씨의 ‘정물’ 시리즈도 빠질 수 없다. 그의 사진은 마치 그림을 카메라로 촬영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물 위에 색을 칠하고 사진으로 촬영한 것이다. 준비에만 평균 8시간이 소요된다.

현실을 철저히 재구성하고 연출하는 ‘메이킹 포토’는 1980년대 서구에서 유행했던 사진의 한 경향. 신디 셔먼, 샌디 스코글런드 등이 대표적 작가이다. 메이킹 포토는 정밀하고 이성적인 느낌의 유형학적 사진과 함께 세계 사진계를 대표하는 두 흐름인데 국내에서는 2000년대 초중반 유형학적 사진이 먼저 도입된 데 이어 최근 메이킹 포토가 유행하는 것이다.

▲ 작가 고상우씨의 ‘영원을 약속하다 2’
사진비평가 최봉림씨는 “2000년대 들어 한국에서는 유난히 유형학적 사진이 유행하면서 젊은 작가들이 강박관념에 걸릴 정도로 이를 좇아가려 했다. 그러나 5년여쯤 이런 흐름이 지속되다 보니 독창적인 유형학적 사진을 계속 찍기가 쉽지 않아 작가들 스스로 방향전환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메이킹 포토가 유행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작가 이윤진, 김도균, 김상길, 구성수 등이 작업해온 ‘유형학적 사진’은 독일의 사진 전통에 기반한 사진으로 주로 도시의 풍경, 건축물, 자연물을 대형 카메라로 조리개를 꽉 조여서 촬영해 매우 냉정하고 이성적인 느낌을 준다.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의 베른트 베허를 사사한 토마스 루프,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스투르스, 칸디다 회퍼 등이 대표 작가이며 국내 작가 상당수가 이곳에서 유학했다.

최씨는 “모더니즘 시대에는 ‘순간포착’ ‘현실의 기록’ 등 대상의 충실한 재현이 사진의 기능이라고 인식됐지만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사진론이 등장하면서 현실의 연출을 통해 현실의 이면을 드러낸다든지 새로운 현실을 작가가 창조·연출, 설치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 등으로 ‘스트레이트 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으로는 더 이상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하기 힘들게 된 것도 메이킹 포토가 유행하는 원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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