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여행 중 걷기 여행이 가장 화려해"

  • 등록 2009-08-06 오후 12:01:00

    수정 2009-08-06 오후 12:01:00


 
[조선일보 제공] '바람의 딸' 한비야씨와 서오릉 걷기
"99도가 아니라 100도로 끓는 삶이 멋있으니까 다시 도전"
"남들 기준으론 늦었지만 내 시간표에 따르면 지금부터 전성기죠"

"제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니까, 흉내만 내는 삶은 너무 초라하니까, 99도가 아니라 100도로 끓는 삶이 멋있으니까 다시 도전해보려 합니다. 여러분도 며칠을 밤새도 즐겁고 기운이 솟는, 가슴 뛰는 일을 찾으셨으면 해요."

각 분야 명사가 독자와 함께 전국 구석구석 아름다운 길을 찾아 걷는 월간 기획 '워킹토킹' 7월 주인공은 한비야(51)씨다. 오지 여행가로 이름을 떨치게 한'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반'과 최근 출판해 베스트셀러에 오른 에세이집 '그건, 사랑이었네'등의 저자인 한씨는 국제 구호단체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에서 9년 동안 일하다 "인도적 지원에 대한 전문 지식을 쌓고 싶다"며 8월 미국 유학 길에 오르기로 했다.

비 뿌리던 지난달 17일 북한산 자락 봉산 능선에 모인 20명의 독자들은 묻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듯했다. 한씨는 쏟아지는 질문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서 말 빠른 버릇을 못 고치는 것 같다"며 까르르 웃었다.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 은평구 경계를 이루는 봉산 능선을 지나 서오릉까지 이어지는 길은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질문에 답하며 걷는 동안 한비야씨는 "남들 기준으로는 늦었을지 모르지만, 내 시간표에 따르면 지금부터가 전성기라 믿는다"고 거듭 힘주어 말했다.

"저는 사람을 꽃이라고 생각해요. 개나리처럼 10대에 피는 사람, 분명 있을 거예요. 아이돌 스타나 김연아 선수처럼. 하지만 가을에 피는 국화도 꽃이잖아요. 자기가 들국화인지도 모르고 개나리만 보고 부러워하면 안 되잖아요. 저는 학교도 6년이나 늦게 갔고 첫 직장(홍보대행사)도 10년이나 늦었어요. 2002년 긴급구호 현장(아프가니스탄)에 처음 나갔더니 제 또래들이 벌써 25년차쯤 되더라고요. 이제 또 공부하러 떠나는 것도, 세상 기준으론 아마 30년쯤 늦었겠죠. 그런데 저는 뒤처졌다고 생각 안 해요. 난 가을국화니까, 지금까지의 결심과 경험이 모여 50대·60대에 환하게 빛나겠구나 확신하니까."

기분 좋게 오르내리길 반복하는 봉산 능선은 쉼터와 정자가 곳곳에 있어 느리게 걷고 틈틈이 쉬기 제격이다. 싱그러운 여름 내음을 뿜는 울창한 숲은 굵어지는 빗방울을 가릴 정도로 넉넉하고 짙었다. 20대 젊은 참가자들은 '비야 언니' '비야 누나'에게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아직 찾지 못했다"는 고민을 털어놨다.

"당연하죠. 스무 살에 어떻게 그걸 찾겠어. 그런데 그건, 자기가 찾는 수밖에 없어요. 가슴 뛰는 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건 아니니깐요. 선생님이 '정답'을 가르쳐줄 수도, 엄마가 밥상 차리듯 도와줄 수도 없는 일이에요. 아직 모르겠으면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죠. 무엇을 할 때 기분이 좋은지, 어떤 일을 한다면 죽어도 아깝지 않은지… 밤을 새우고 또 새우더라도 물귀신처럼 생각을 거듭해야 해요."
밝은 모습으로 유쾌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다가도 한씨는 참가자들의 입에서 '촉박' '불안' '한계'란 단어만 나오면 "누가 그러냐. 다른 사람의 시간표엔 신경 쓰지 마라"고 정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국제 구호 관련 일을 하고 싶은데 처참한 현장의 모습이 두려워 망설여진다는 20대 여학생에게는 "가보지도 않았는데 두려운 걸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었다.

"사실 자기 한계는 해보는 데까지가 아닐까요? 산을 오를 때도 내가 발로 디딘 만큼이 한계지 산 아래서 '내 한계는 2000m야' 이런 식으로 정해놓는 건 아니잖아요. 눈 딱 감고 발을 디디고 나면 제멋대로 미리 만든 한계란 무의미하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순간 날개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처럼."

능선을 벗어난 길은 포장된 도로를 거쳐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어졌다. 서오릉엔 지난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40기(基) 왕릉 중 경릉(덕종) 창릉(예종) 명릉(숙종) 익릉(인경왕후) 홍릉(영조) 등 다섯 기가 자리 잡고 있다. 온화하고 고즈넉한 능을 여유 있게 돌아보도록 한 산책로가 넓고 단정한데 외곽을 한 바퀴 걷는 가장 긴 길(약 5㎞)이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한씨는 "세계 어디를 다녀도 우리나라 왕릉같이 예쁜 왕의 묘소가 없고 한국 산처럼 아늑한 산이 없더라"고 했다. "저는 매일 산에 가요. 나무 색깔이 달라지고 꽃 색깔이 변하는 게 신기하고 사랑스러워요. 그리고 산길을 걷고 오면 꼭 좋은 생각이 나요. 기분 상한 일은 털게 되고 복잡한 일은 정리가 되고…. 산에 가는 게 좋아서 무지 많은 소개팅 다 놓쳤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수많은 여행 중에 '걷기 여행'을 최고로 꼽는 이유에 대해선 "가장 화려하고 짭짤한 여행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행기를 탄다고 생각해보세요. 빨리 갈 수는 있지만 걸으며 챙길 수 있는 풍경과 향기, 수많은 사건들 다 놓치잖아요. 인생이 여행과 닮았다면 그 '예상치 못함'을 가장 풍성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게 걷기라고 생각해요.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고… 오감(五感)을 몽땅 동원하는 화려한 체험이죠. 참, 내가 못해본 여행 딱 한가지 꼭 가야 하는데. 신혼여행 말이에요, 하하."

촉촉하게 젖은 조용한 왕릉을 돌아보고 나오며 이날 길을 매듭지었다. 떠나야 할 먼 길이 앞에 기다려서인지 한씨를 보내는 독자들의 눈빛엔 아쉬움이 섞였다. "여러분 보시기에 제가 흔들리지 않고 돌진하는 사람 같겠지만 결코 아니에요. 저도 사람인데 그럴 리가 있나요. 힘들 때도 있고요, 두려울 때도 있고요,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공부하고 돌아오면 더욱 단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믿으니까 용기를 내보는 거예요. 여러분, 나중에 우리 만나서 '무슨 일 하고 있어요'라고 물을 때 서로 '제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란 답을 주고받았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문 두드리자고요. 활짝 열릴 때까지 힘껏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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