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딸 친구가 나 때문에 피가 마른다네요"

(휴먼)세브란스병원서 20년간 자원봉사 박영자씨
돌보던 환자 피 부족하다 말하니 딸이 대학친구 데려와 헌혈해줘
"내가 돌본 환자 살릴 수 있다면 죽는날 내 육신 모두 주고 갈 것"
  • 등록 2012-06-15 오후 12:20:00

    수정 2012-06-15 오후 12:20:00

이데일리신문 | 이 기사는 이데일리신문 2012년 06월 15일자 28면에 게재됐습니다.
[이데일리 정유진 기자] “내 나이 일흔다섯이니까 이제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적은 거죠, 떠나는 순간에는 에이즈 환자들이 모여 생활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그들을 돌보다 가고 싶습니다. 남편도 아이도 위험하다고 말리지만 나 아니면 그 사람들을 누가 돌봅니까.”

환자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서 박영자씨를 만났다. 박씨는 지난 20여년 동안 세브란스병원 응급실과 호스피스병동·암센터에서 1000여명이 넘는 말기 암 환자와 에이즈 환자의 임종을 지켰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직전에도 박씨는 말기 폐암으로 각혈하는 남편을 응급차에 싣고 오다 옷에 피범벅이 된 40대 여자 보호자의 피묻은 옷을 갈아입히고 있었다. 박씨가 보호자에게 건넨 옷은 박씨의 남편의 옷이다. 생일에 딸이 선물한 새 옷이라고 했다.

새 옷을 빼앗긴 것을 남편이 아까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런 지 40년이 넘었는데 남편도 포기하지 않았겠어요”며 웃어보였다. 환자와 환자 가족을 위한 것이라면 박씨에게 아까운 것이 없다.

아픈 가족을 쫓아 응급실에 맨발로 뛰어온 환자들에게 자비로 슬리퍼를 사서 신기고 끼니를 챙겨주는 것 정도는 박씨에게 이제 예삿일이다. 가족 없이 의식을 잃고 실려온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박씨를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탓인지 이제는 박씨의 가족들도 박씨 못지않게 환자들을 챙긴다고 한다.

“건국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제 딸이 학교에 다닐 때 제가 돌보는 말기 암 환자가 혈액이 부족하다고 했더니 딸이 학교 게시판에 혈액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죠.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헌혈에 나서지 않자 딸이 협박 아닌 협박을 해서 구해오기도 했습니다. 딸 친구들이 ‘너희 엄마 때문에 수의학과 학생들 피가 말라 간다’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20년 넘게 말기암 환자와 에이즈 환자를 돌보고 있는 자원봉사자 박영자씨, 박씨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환자를 돌보고 싶다”고 했다(사진=세브란스병원 제공).

박씨의 봉사는 젊은 시절부터 시작됐다. 본격적으로 봉사를 시작한 때는 92년 호스피스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따면서부터다.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로만 20년, 그전의 봉사활동 기간까지 더하면 반평생을 가장 많이 아픈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박씨는 오히려 아픈 사람들로부터 감동을 한 때가 더 많았다고 말했다.

박씨는 2000년 초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에서 위암에 걸려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73세 할머니를 돌보고 있었다. 말기 암 환자는 암세포가 번져가면서 몸 곳곳의 조직을 파괴하다 보니 몸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 가족들조차도 가까이서 대화하는 것조차 생활하는 꺼릴 정도였다.

할머니의 딸은 박씨에게 ‘냄새가 날 테니 한 번씩 할머니 방을 살펴만 봐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박씨는 그 할머니를 친언니처럼 대하며 할머니 옆에 누워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눴다. 박씨는 위에서 환자를 바라보면 아픈 데만 보이지만 옆에 누워 있으니 냄새도 나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날 집에 가는데 그 언니가 나오지도 않은 목소리로 화장실을 가리키는데 눈물이 와락 쏟아졌습니다. 일산에서 구로까지 가는데 가는 길에 내가 소변이 마려울까 봐 저를 걱정했던 거죠”

박씨는 98년부터 또 다른 봉사에 나섰다. 감염에 대한 우려로 가족들도 함께 생활하기를 꺼리는 수백 명의 에이즈 환자를 돌보고 있는 것이다. 에이즈 환자 돌보기는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의료봉사자들도 꺼리는 3D 중에서도 3D 봉사 분야다. 세브란스병원 봉사자 중 에이즈 환자를 돌보는 봉사자는 박씨가 유일하다. 박씨에게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에피소드가 있다.

“지난여름 피부에 발진이 났는데 한 달이 지났는데도 피부병이 낫지 않자 덜컥 겁이 나지 않았겠어요. 며칠 밤을 뜬눈으로 꼬박 지새다 보건소에 가서 에이즈 검사를 받았습니다. 친절한 얼굴로 인사를 하던 보건소 직원이 에이즈 검사를 받으러 왔다고 하자, 반말에 눈도 마주치지 않고 턱으로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검사 지시를 하더군요. 그때 에이즈 환자들에게 더 잘해줘야 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남들 같으면 환자들을 원망하며 환자들로부터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을 만한 일인데 박씨는 달랐다. 궂은 일을 당하기 일쑤지만 박씨는 자신이 보건소에서 받았던 홀대를 생각하며 에이즈 환자들의 곁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박씨도 힘들 때가 있다. 본인이 에이즈에 걸린 것을 사회에 대한 원망으로 돌리고 불만을 터뜨리는 환자들의 눈빛을 볼 때다.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을 숨기고 살면서 무차별적으로 에이즈를 퍼뜨리겠다는 소리를 들을 때면 가슴이 아파요. 그럴 때면 제가 더 독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세게 나무랍니다.”

모진 말을 하고 나면 연약한 박씨는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고 한다.

“희한하게 에이즈 환자들은 하나같이 정이 많고 착해요. 그런 사람들이 에이즈에 대한 사회의 인식 때문에 병명도 밝히지 못하고 살아가니 한 번쯤 비뚤어진 생각을 하지 않겠어요”

박씨는 이제 우리 사회에 남은 육신도 주고 갈 준비를 한다. 시신기증, 안구기증 모두 예약해뒀다. 헌혈은 너무 많이 해서 몇 번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살이나 뼈 근육도 필요한 사람에게 모두 주기 위해 인체조직기증도 생각하고 있다.

“언니가 췌장암으로 최근 저세상으로 갔어요. 나도 언제 암에 걸릴지 모릅니다. 그전에 조직기증 서명도 해야겠지요. 내가 돌봤던 환자들이 내 몸으로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게 없을 것 같아요”

◆박영자씨는?

박영자씨는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쌀가게를 했던 남편 사이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1992년 정식 호스피스 자격증을 취득하고 세브란스병원 암센터·응급실 등에서 3만 시간이 넘게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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