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5월 당시 한국신학대 2학년이었던 류동운 열사는 5·18 초기 계엄군에게 붙잡혀 모진 가혹행위를 당했다.
이틀만에 풀려났지만 그는 일기장에 ‘병든 역사를 위해, 한 줌의 재로’라는 글을 남기고 다시 금남로로 돌아갔다.
춘태여상(현 전남여상) 3학년이었던 박 열사는 방송 차량의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피가 필요합니다’라는 소리를 듣고 헌혈에 나섰다.
박 열사가 참여한 헌혈은 금남로 주먹밥과 함께 ‘오월 공동체’와 ‘광주 대동정신’의 상징으로 꼽힌다.
역사 교사였던 김용근 열사도 당시 수배 중이었던 제자들을 숨겨줬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17년생인 김 열사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신사 참배를 거부한 독립유공자이기도 하다.
19세의 나이로 항쟁에 뛰어든 한강운 열사는 차량 정비공으로 일하다 당시 광주 사직공원에서 다른 시민군들과 함께 경계하다가 체포됐다. 고문 휴유증으로 20여년을 시달리다가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