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장영은 기자] 그런 물건들이 있습니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 어떤 시대나 감수성을 대표하고, 그에 대해 아는지 여부가 같은 세대 사람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 말입니다.
‘삐삐’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난 분들은 그런 물건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모를 것 같습니다. 휴대용 무선 호출기 삐삐는 1990년대를 주름잡았던 ‘소통’의 수단이자, 아이콘이었습니다.
휴대폰이 보급되기 전, 그러니까 무선전화조차 그리 흔하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에 집 밖에서 연락이 가능한 유일하다시피 한 수단이었습니다.
이제는 삐삐를 안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옛날 사람’ 취급받을 정도인데요. 휴대폰이 나오고 스마트폰이 보편화 되면서 그야말로 ‘유물’처럼 돼 버린 삐삐를 만들던 회사가 아직 건재하다고 합니다.
|
주인공은 ‘리텍’이라는 회사입니다. 여전히 삐삐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비슷한 제품을 만들고 있었는데요. 다름 아닌 ‘진동벨’이었습니다.
리택은 1997년 설립된 회사로, 처음에는 삐삐를 만들어 미국으로 수출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휴대폰이 등장하면서 무선호출기 시장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진동벨로 사업 모델을 바꾼 것이지요.
리텍은 국내에 진동벨, 그러니까 대기고객 호출 시스템을 처음 소개한 회사입니다. 2000년대 초 이종철 리텍 대표가 미국 출장 길에 우연히 어느 대형 푸트코트에서 진동벨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국내에 도입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다고 합니다. 아이디어는 가져왔지만 자체 기술력으로 제품을 만들어 내야 했던 것이지요. IC칩이나 배터리 등 주요 부품 개발을 비롯해 적당한 진동 강도, 손에 쏙 들어오는 제품 크기와 디자인 등을 연구하고 시험한 끝에 2002년 국내 최초로 진동벨 개발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당시 만들었던 제품이 크랜베리(적갈색) 색상의 직사각형 모양의 진동벨인데요. 길이는 10㎝, 무게는 100g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원형이나 하트 모양 등의 진동벨을 쓰는 곳도 많지만, 여전히 직사각형 진동벨을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진동벨은 거의 리텍 제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국내 전동벨 시장에서 90%(2017년)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미국,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50여개국에 수출해 해외에서도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업 초기 국내에선 아직 전동벨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해외 진출에 나선 덕분이라고 합니다.
진동벨만 놓고 본다면 대단히 획기적인 기술이 적용된 것은 아닙니다. 삐삐와 진동벨 모두 가장 기본적인 무선통신 방법인 RF(Radio Frequency)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꼭 혁신적이고 난이도가 높은 기술만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요.
진동벨을 사용하기 전에는 번호표를 주기도 했고, 시킨 메뉴를 부를 때까지 마냥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진동벨을 받아들고 자리에 앉아 있으면 ‘드르륵’ 하는 진동이 올 때까지 잠시 딴짓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익숙해져서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진동벨 덕분에 지루할 수 있는 대기 시간을 한층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첨단 기술의 시대에 기업이 가지고 있던 기술을 바탕으로 시대의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고 또 성공했다는 점에서 리텍의 사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