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미술 작품 대작, 나아가 불법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검찰은 불구속 기소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여론은 조영남에게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조영남은 창작과 대작 사이에 끼여 꼼짝 못하고 있다. 어쩌면 조영남은 기준조차 명확하지 않은 창작과 대작의 범위를 놓고 지루한 법정 공방을 펼쳐야 할지도 모른다.
설령 조영남의 말처럼 대작이 미술계의 관행이라 해도 그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도덕적 잣대는 더욱 가혹할 수밖에 없다. 유명 연예인데다가 ‘미술계 이단아’라 할 수 있는 그가, 대작이라는 말하지 말았어야 할 비밀 아닌 비밀(?)을 말했기 때문이다. “관행이란 말로 진실을 덮으려 한다” “존귀한 창작 예술가들이 매도당했다” “대작자에게 점당 10만원을 준 것은 가진자의 횡포다” 등 비난의 불씨를 당긴 이 말 한마디가 진위를 떠나 더 큰 공분을 불러일으킨 셈이다. 대작의 진위나 불법 여부는 법정에서 밝혀질 일이다.
그렇다면 창작과 대작의 경계는 어디일까. 그동안 소설, 미술, 논문, 자서전, 심지어 대중음악과 시나리오 같은 창작예술품에 이르기까지 대필과 대작 논란은 끊임없이 야기되어 왔다. 창작인지 모방인지, 진품인지 모조품인지를 둘러싼 논란은 창작이라는 예술의 범주를 어디에 두느냐는 관점과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창작의 기준을 아이디어에 둔다면 아이디어의 구현 방법이나 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조영남 미술작품 대작 사건 역시 그렇다. 조영남이 화투를 소재로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쌓아 올린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영남이 그린 작은 그림을 무명작가가 확대해서 크게 그렸다든가, 조영남이 스케치한 그림을 대작자가 덧칠한 수준이라면 완성작의 저작권을 용인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조영남이 대작자의 창작품에 덧칠을 한 수준이거나 그의 매니저가 대작자에게 무단으로 작품을 의뢰하는 과정을 알고도 묵인했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다.
그가 어느 공연장에서 말한 화투 그림에 대한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화투를 오래 가지고 놀다가 쫄딱 망했다.” 당시 그의 자조적인 말처럼 이번 논란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새삼 일깨워주는 사례임이 분명하다.
◇조대원 국제대 엔터테인먼트 계열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