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발빠른 통화긴축정책이 경기를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유가에 반영되고 있는 만큼 향후 유가 움직임이 인플레이션과 경기 사이에서의 시장심리를 가늠할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5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8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전일보다 배럴당 8.2%, 8.93달러 떨어진 99.50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WTI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 아래로 내려간 것은 지난 5월11일 이후 거의 두 달 만이며, 이날 낙폭도 근 넉 달 만에 가장 큰 폭이었다.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서 거래된 9월 인도분 브렌트유 역시 하루 만에 9.5%나 급락하면서 배럴당 102.77달러에 장을 마감했다.
이 같은 국제유가 급락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통화긴축정책이 경기를 둔화시킬 것이라는 우려와 그에 따른 위험자산 회피가 반영된 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 이날 원유 외에도 밀과 은(銀)은 물론이고 경기 전망을 보여준다고 해서 `닥터 코퍼(Dr. Kopper)`로도 불리는 구리 가격까지 동반 추락했다. 블룸버그 원자재지수는 하루 만에 4.5% 주저 앉았다.
경기침체 공포는 시장지표에서도 잘 드러났다. 이날 미 채권시장에서는 지난 3월과 6월에 이어 다시 미 국채 2년물 금리가 10년물 금리를 웃도는 이른바 장단기금리 역전이 재차 나타났다. 흔히 장단기금리 역전은 경기 둔화 혹은 침체의 전조로 받아들여진다.
실제로도 블룸버그 이코노믹스 전망에 따르면 내년도 미국 경제가 침체를 겪을 확률은 38%에 이르고 있다. 케네스 폴캐리 슬레이트스톤웰스 선임 시장전략가는 “만약 연준이 통화정책 기조를 바꾸려고 한다면 당장 짐을 싸고 집안의 불을 꺼야 하지만, 그런 움직임이 없다”며 “경제가 둔화하고 있지만, 인플레이션이 발등의 불인지라 연준은 이에 집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나치게 높아진 유가 수준과 경기 침체 우려로 원유나 석유제품 수요가 줄어드는 것도 눈으로 확인되고 있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6월 한 달 간 평균 휘발유 수요는 전년동기대비 2%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갤런당 5달러를 돌파했던 미국 내 휘발유 가격도 최근 평균 4.80달러로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다.
석유 컨설팅회사 리터부시앤어소시에이츠의 짐 리터부시 대표는 “하반기 경기침체 전망이 급물살을 타면서 수많은 원자재를 짓누르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일각에서는 굳이 경기침체가 오지 않더라도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가운데 영국 등에서도 사우디의 원유 증산을 압박하고 있는 만큼 공급 확대에 따른 유가 하락을 점치는 쪽도 있다.
다만 여전히 원유 수요가 탄탄한 데다 증산 자체가 단기간 내 나타나기 힘든 만큼 재차 유가가 반등할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앰리타 센 에너지어스펙츠 애널리스트는 “최근 원유 매도세는 주로 원유시장 내 펀더멘털보다는 막연한 경기침체 우려나 안전자산 선호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며 “경기침체 우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유 수요는 강하고 공급은 제한적인 만큼 조만간 다시 유가는 반등할 것”이라고 점쳤다.
또한 일부 휴전 가능성이 점쳐지긴 해도 우크라이나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 지도 유가에 변수가 될 전망이다. 지난주말 JP모건은 “서방권 경제제재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러시아가 원유 생산을 줄인다면 최악의 경우 유가가 배럴당 380달러까지 갈 수도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