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판사다] 사형선고한 날엔 밤새 술만 마셨다

흉악범에게 사형 확정 선고후 밤새 통음
얼굴 모르는 사법연수원 동기에게 전화 걸려오기도
사무실서 밤새 판결문 쓰다보면 인생에 회의감 들어
  • 등록 2015-07-24 오전 6:30:00

    수정 2015-07-24 오후 3:40:00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주문,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나는 판사다. 처자식과 부모를 살해한 ‘극악무도한’ 흉악범이 있었다. 재판부 합의에서 사형으로 결론이 났다. 나는 사형 주문을 읽었다. 그날 밤새 술을 마셨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1310명에게 사형을 집행했다. 1997년 12월 30일 마지막으로 23명을 사형 집행한 이후 현재까지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수감 중인 사형수는 현재 58명이다.

한 사람의 인생과 목숨이 달린 일이다. 판결은 완벽해야 한다. 좀 더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자정을 넘겨 집에 가는 게 일상이다.

곧 여름과 겨울 2~3주 동안 재판을 쉬는 기간인 휴정기다. 올해 휴정기는 7월 마지막 주와 8월 첫째 주(7월27~8월7일)다. 휴정기 덕에 천장에 닿을 듯 쌓인 재판 기록물 높이를 조금을 낮출 수 있겠다. 2013년 기준 전국법원에 접수된 사건 수는 1846만6987건. 판사 1명당 6645건꼴이다.

‘완벽한’ 판결이라도 실형 선고는 껄끄럽다. 동종전과를 가진 성폭행 범죄자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그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항소심은 그를 집행유예로 석방했다. 그사이 피해자와 합의한 덕이다. 그는 항소심에서 죄를 인정한 것일까. 혹시 나도 모르게 그에게 죄를 인정하라고 강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때론 개인적 판단과 별개로 기계적인 판결을 내릴 때도 있다. 양심적 병역 기피 사건은 무조건 유죄다. 양심적 병역기피로 재판정에 선 피고에겐 무조건 징역 1년6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하면 끝이다. 올 7월 현재 706명이 43개 교도소에 병역 거부로 갇혀 있다.

법원 밖에서는 판사가 변호사 개업을 하면 떼돈을 버는 줄 안다. 사람들은 판사를 ‘전관(前官)에게 고개 숙이는 현관(現官)’으로 여긴다. 풍문으로 떠도는 ‘전관예우’다. 들어본 사람은 많지만 실체는 불투명한 게 전관예우다. 한번은 연수원 동기라는 판사 출신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에 재판을 맡게 됐으니 잘 부탁한다’고 하더니 끊었다. 얼굴도 모르는 동기다. 나중에 들어보니 의뢰인 앞에서 담당 판사한테 전화하는 게 영업 방법 중 하나란다. 의뢰인은 막연히 전관예우를 좇고, 다른 누군가는 의뢰인의 간절한 마음을 악용한다.

때로는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보다 공정하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판사가 된 이후로 동창회나 동기 모임에 발길을 끊었다. 친구들과 멀어졌지만 쓸데없는 구설에 휘말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대학 때부터 즐기던 테니스에서 낚시로 취미를 바꿨다. 혼자 할 수 있는 취미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다고 밖에서 보는 시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얼마 전 법원에 견학 온 학생이 던진 질문이 생각난다. “판사님은 한 달에 뇌물을 얼마나 받아요?”

어린 시절 ‘정의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 싶어 숱하게 코피를 흘리며 공부해 판사가 됐다. 때로는 누군가의 삶을 결정하기도 하는 판결문. 20년 넘게 판사생활을 하는 동안 수천 장을 써댄 덕에 이제 어떻게 판결문을 써야 하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왜 내가 다들 퇴근한 법원 사무실에서 밤새 판결문을 써야 하는지 회의감이 갈수록 커진다. 나는 대한민국의 판사다.

(이 기사는 취재내용을 바탕으로 스토리텔링으로 재구성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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